김필순(金弼淳)
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Namespace detect/data' not found. 사천김씨(泗川金氏) 직중(直仲)파 18대조 김필순(金弼淳)
공께서는 사천김씨 직중파 17대손 응상 공의 3째 아들로 1883년 음력 5월 28일 강원도 양구군 군량리에서 태어나 1943년 7월 21일 돌아가셨으며,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원동리에 모셨다가 후손들이 조성한 사천김 17대조 응상파 가족묘원 이장계획에 의하여 2006년 9월 1일 강원도 양구읍 군량리에 소재한 이곳 가족묘원에 이장되시었다.
공께서는 18세 되시던 해 부인 장흥 고. 희숙 여사와 혼인, 슬하에 종락, 종환, 종선, 순옥 등 3남 1녀를 두시었고, 32명의 손을 두시었다. 며느리를 포함하면 52명이며, 외손 포함하면 100여명이 넘는 손을 두시었다.
공은 평소 학문에 뜻을 두어 주경야독 공부를 하여 조상대대로 선비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아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조선 왕조의 마지막 혼란기 시절,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공은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자,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 군량리에 그대로 남아 양구 향교에 적을 두시고 고향의 발전과 안정을 위한 일과 종사에 몰두하시었다.
생활이 어려운 시절, 그 당시 공은 집안의 내부적인 일로서는 집안의 대소사 일을 몸소 앞장서시어 친지들의 애사를 함께 해결하시었으며, 특히 공의 맡 형인 재상(載商)의 아들 종국(鐘國)을 친자식과 같이 돌봐주고 키워, 결혼까지 시켜주었으며, 또한 공의 손위 처남이 노후 의지할 곳이 없자, 공의 댁으로 모시고 3년이상 수발을 하시었으며, 손위 처남이 타계하신 후에도 3년상 삼제를 봉사하시는 등 후손들이 잘 모르는 일이 많이 있으나, 이러한 일이 당연하다는 듯 공께서는 자신의 덕을 내세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시었다.
집안의 외적인 일로서는 대소 상제의 집사나 축관으로 초빙을 받아 고향의 어려운 대소사를 해결해 주시고 농사일을 하시면서도 외출 시에는 학자풍의 외모와 걸출한 용모에 흰색 두루마기, 큰 갓 등을 단장하시는 등 몸 단정을 항상 깨끗하게 하시어 말끔한 선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계시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부인 고씨의 내조의 덕이 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공은 양구군 군량리에서 결혼을 하시고 이후 몇 년 안되어 양구군 남면 도촌리 279번지로 이사를 가 살림을 차리시어 3남 1녀를 보시고 난후, 1935년 3월 그간 정든 고향을 떠나 38 이남인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원동리 588번지(다리골)로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이사를 와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게 되시었다. 이곳에서는 홍천군 두촌면 평의회 의원을 맡아 고향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활동을 하시었다.
공의 선견지명이신지는 몰라도 38이북인 강원도 양구에서 38이남인 강원도 홍천으로 이사를 오셔서, 1950년 6.25 참상으로 인해 공의 형제와 대부분의 친가가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보았으나 공께서는 형제 중 유일하게 한명의 가족도 피해를 보지 않아 오늘의 번성한 자손을 보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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