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서원 (경남)
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Namespace detect/data' not found. 도계서원은 함안의 공신 葛村 李潚(1550~1615), 仁原君 李休復(1568~1624), 武肅公 朴震英(1569~1641), 道谷 趙益道(1575~1647) 등 네 분을 享祀하기 위해 1780년 창건하였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고 복원되지 못한 채 유허비만 남아 있다.
향되었던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 갈촌 이숙
1592년 4월 제포(薺浦, 진해 웅천)만호 재임 중 함안에서 창의하여 의병을 이끌고 달려온 광서 박진영과 천성진 만호 문암 신초 장군과 함께 김해성에 침입한 왜적과 決死抗戰하였으나, 衆寡不敵으로 城이 함락되자 문암, 광서와 九死一生으로 탈출하여 망우당 郭再祐 장군과 창의하여 의령 정암진(鼎巖津)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왜적들이 진주를 거쳐 전라도로 진격하고자 하는 길을 차단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전란 7년간 망우당과 生死苦樂을 같이 하면서 화왕산 전투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적을 막아냈다. 전란 후 선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고 합천군수를 역임하였다.
■ 인원군 이휴복
1592년 6월 임진왜란으로 양친과 형님 내외가 왜적에게 살해 당했을 때 公이 양친의 시신을 안고 기절하매 왜적이 공도 죽은 줄 알고 그대로 지나갔다. 27세 때 상복을 벗자 붓대를 꺾고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진주와 의령, 함안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장군이 있는 창녕 화왕산성으로 달려가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1606년 무과(武科)에 장원을 차지했으며 훈련도감(訓練都監)을 거쳐 1617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어 남해의 성을 보수하고 전함을 정비하니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 칭찬했다.
1624년 자산군수에 임명되어 미처 부임하기 전에 이괄이 난을 일으켜 서울까지 침범하니 公으로 하여금 순천군수(順天郡守)의 서리(署理)를 겸임해 진압케 했다.
公이 반란군의 아홉 장수의 목을 베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인원군(仁原君)에 봉해지고 순천군수에 임명됐다.
■ 무숙공 박진영
조선 최초로 1592년 4월 아버지 동천 박오(朴旿)와 창의하여 의병을 이끌고, 천성(天城, 가덕도)만호 문암 신초 장군, 제포 만호 갈촌 이숙 장군과 김해성에 침입한 왜적들과 결사 항전하였으며, 城이 함락된 후 함안으로 돌아와 군수 柳崇仁과 향병을 모아 함안을 사수하던 중 권율(權慄) 장군 휘하로 들어가 종군하였다. 전란 7년간 수많은 전공으로 朝命이 일곱 번 내려져 陞差하였으며, 1593년 幸州山城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전란 후 선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고 관직에 나아가 조선의 서북방을 방어하는 장수로 크게 활약하였다. 1624년 이괄 난 때 경흥도호부사로 난을 진압하는데 우협대장으로 출전하여 반란군 진영의 병졸 3000여 명을 귀순시키고, 궁궐에 난입한 반란군을 한양 외각 길마재로 유인하여 궤멸시키는데, 결정적 공을 세워 아들 2명과 三父子 진무원종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死後 尊周錄에 등재되고, 諡號 武肅을 내리고, 大報壇에 배향되었으며, 不遷之位를 내렸다.
■ 도곡 조익도
1612년 형난원종공신(亨難原從功臣)에 오르고, 1624년 이괄의 막료(幕僚)로 이었으나. 반란에 가담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仁祖에게 반란군 토벌에 참전할 것을 청하여 도원수부에서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인조는 악무목 정충록(岳武穆 精忠錄)을 내리고, 진무원종공신에 녹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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