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군성 (1880년)
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Namespace detect/data' not found. 유군성(劉君星 : 1880∼1947년)
1924년 인천 중구 신흥동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의 정미소 운영한 인물. '유군성 정미소'가 최초로 정미기 5대를 갖추고 남녀 직공 70명이 하루에 현미 250석, 정미 100석을 처리했음.
"본관은 강릉으로 강화 월곶리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적 부모를 잃고 약관의 나이에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이주하였다. 민첩하고 수완이 남달라 점차 상업계에서 선구자라는 명예를 얻었으며 큰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그는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성품을 지녔다. 목재업, 정미업을 경영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심각한 손실을 본 적도 있다. 또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향리인 강화의 크고 작은 일을 비롯하여 사회사업이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 도타운 성정(性情)과 풍모(風貌)에 대하여 칭송하는 사람이 많다." - 박헌용 1932년 집필한 강도지(江都誌) 中
유군성은 동구 송림동에 위치한 동산중·고등학교의 탄생에 초석을 다졌다. 학교법인 동산육영회가 지난 1988년 펴낸 '동산50년사'에서 교육에 큰 뜻을 품었던 그의 행적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한국인을 위한 학교 설립을 인정하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설립허가서조차 제출할 수 없었던 1938년. 지금의 동산중·고교의 요람인 인천상업강습회가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체계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정규기관은 아니었다. 이때 한 단계 높이 발돋움하도록 재정적 도움을 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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