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단(崔鄲)
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Namespace detect/data' not found. 최단(崔鄲)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호(號)는 명암(明菴)이다. 품계는 광정대부(匡靖大夫)[1]로 안동도원수겸 부사(1387년 9월부터 1388년 11월)를 거쳐 위화도회군때 공을 세워 공양왕 2년에 회군공신, 조선 태조2년 개국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시호(諡)는 광정(匡靖)이다. 할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候) 수운(峀雲)이고, 아버지는 어사중승(御史中承)집현전학사(集賢殿學史) 호(澔)이다.
생애1[편집]
고려사 실록에 따르면 1380년(우왕 6) 판사(判事)로서 부정 안천길(安天吉)과 함께 서북면에 파견되어 요동의 소란한 정세를 정탐하였다. 밀직부사로 재직하던 1384년에는 최영의 요청으로 당시 우왕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한 문달한(文達漢)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진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함께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기도 하였다.
1387년에는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안동도원수겸 부사(府使)로 재임했고 1388년 요동정벌을 단행할 때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좌군도통수 조민수(曺敏修)의 휘하로 출정하여 위화도회군의 공을 세웠다.
1608년 서애 류성룡의 지시로 한강 정구 등에 의해 편찬된 안동 사료인 《영가지(永嘉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崔鄲 安東道元帥兼府事. 匡靖洪武丁卯赴戊辰遞." 여기서 광정은 광정대부, 홍무는 명 태조 주원장 연호, 정묘 무진은 1387년부터 1388년까지 재임 기간이다. 1388년 5월 회군 후에는 안동도원수겸 부사로 다시 부임해 경상도순문사 박위(朴葳)와 함께 상주 중모현에서 왜구를 소탕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한양윤(漢陽尹)을 거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고, 무진회군공신에 녹훈되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1393년(태조 2) 태조가 위화도회군에 공을 세운 이들을 다시 포상했을 때 회군공신 3등(10인)에 책록되었다.
생애2[편집]
원본이 실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주최씨족보》인 정유보(丁酉譜, 1777년)에 따르면 최단(崔鄲)은 <청하후 7세손 합문지후 수운파>(淸河侯 七世孫 閤門祗侯 峀雲派) 의 후손이다. 청하후(淸河侯)는 최승로(崔承老)의 봉호이고 수운(峀雲)은 단(鄲)의 조부이다.
정유보에는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최은함(崔殷含)-최승로(崔承老)-최숙(崔肅)-최제안(崔齊顔-최계훈(崔繼勳)의 상계(上系)와 함께 최수운(崔峀雲)-최호(崔澔)-최단(崔鄲)에 이어 최단(崔鄲)-최재전(崔在田)-최맹연(崔孟淵)-최유(崔洧)의 파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금의 충의공파보(忠義公派譜)이다.
정유보는 1672년 사관이었던 동주공(휘 商翼)이 시작해 중태(重泰)-명상(命相)-태진(台鎭)을 거쳐 공급(公伋,1731-1791)이 4대에 걸친 선대의 작업을 이어 105년만인 1777년에 편찬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온라인으로도 열람되는《경주최씨족보: 원보밀직파》(1832년)에도 은함(殷含)-승로(承老)-숙(肅)-제안(齊顔)-계훈(繼勳)의 상계(上系)와 함께 수운(峀雲)-호(澔)-단(鄲)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원보(元甫)는 문창후의 아들이자 청하후의 아버지인 은함의 관직명이다. 1777년과 1832년 발간된 이들 경주최씨족보는 관가정공파가 주도해 편찬한 족보이다.
17세기 보학자인 조종운(趙從耘, 1607~1683)의 《씨족원류》 부전(附箋, 867쪽)에는 경주최씨 최단(慶州崔氏 崔鄲)의 파보를 전하는데 이는 최단(崔鄲)의 손자인 맹연(孟淵)의 한(澣), 식(湜), 유(洧), 징(澄) 등의 사자(四子)중에서 삼자(三子)인 충의공(忠義公) 유(洧)의 파보가 실려있는《정유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기록-포은집[편집]
《포은집(圃隱集)》에는 정몽주(鄭夢州)가 1380년 밀직사제학 벼슬을 받은 후 둔촌 이집(遁村 李集, 광주이씨)에게 보낸 답서가 있는데 이글 말미에 최단의 기록이 있다. "崔鄲之女之母族 亦眞兩班也 余聞之三寸李敬之判書." 이 글은 정몽주의 유명한 유필로 전해지고 있으며 양반을 언급한 역사적 기록으로도 인용되고 있다.
이 편지가 오고간 이후 둔촌은 문과에 급제한 장남 이지직(李之直)을 이경지의 숙부인 이과(李薖) 집안으로 장가를 보냈다. 최단의 당숙인 관가정 최청(崔淸, 1344~1414)의 장인은 이경지의 재종형인 이성중(李誠中, 개국원종공신)이다.
동명이인 고증[편집]
조종운의《씨족원류》 589쪽 대령최씨(大寧崔氏) 편에는 최단(崔鄲)의 방주(傍註)에 [대령군(大寧君)][1]이라는 하나의 직함만 기록되어 있다.
1744년 제작된 가장 오래된 해주최씨족보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방주에 최단의 관직은 [대령군(大寧君)]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14년 남명섭의《조선과환보 》에는 문무과, 음사편이 실려있는데 <해주최씨 음사편> 최단의 방주에 [대령군(大寧君)]만 기록되어 있다.
광산김씨 대종회 자료에는 김광철(1285~1349)의 장녀가 최충손에게 출가하였고 외손서로 [해주인 대령군 최단]이 기록되어 있다. 대령군 이외 다른 관직은 없다.
한편 대령군(大寧君)은 대령최씨 최단의 증조부 최유엄(崔有渰)이 1309년 받은 관직이라고 고려사에 나온다. 최유엄은 1324년에 대령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최단이 대령군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다.
이와 달리, 《씨족원류》867쪽 경주최씨(慶州崔氏) 편에는 [광정(匡靖),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겸 판한남윤(判漢南尹), 개국원종공신(開國元從功臣), 회군공신(回軍功臣), 판사(判事)] 등이 적힌 최단(崔鄲)의 방주와 함께 자(子) 재전(在田), 손자 맹연(孟淵), 증손자 유(洧), 고손자 연수 담수 창수 영수(延壽 潭壽 昌壽 永壽) 등 5세(五世)까지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1777년 경주최씨족보인 정유보와 그이후 기록과 일관되게 일치한다.
《씨족원류》는 방주(傍註)의 직함과 후손들의 파보를 통해 <경주최씨 최단>은 <해주최씨 최단>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동명이인임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대령최씨의 각종 역사기록물에 따르면, 최단의 관직은 [대령군(大寧君)]이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지만, 경주최씨 광정공파 파조인 최단의 관작인 [안동도원수겸 부사]와 [개국원종공신]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들의 출생연도 또한 한 세대 정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대령최씨 최단은 그의 고조부 최자(崔滋)가 1188년생인데 이로 미루어 4세대 120년 후인 1308년 전후 출생이 예상된다. 이에 비해 경주최씨 최단은 그의 아들 재전(在田)이 1458년에 군자감정을 제수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씨족원류》와 안동도원수 겸 부사의 재임기록이 있는 《영가지》를 감안하면 1340년대 이후 출생한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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