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스크립트 오류: "Unsubst" 모듈이 없습니다.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의미] 대한민국에 있는 자음자이며 세종이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창제한 문자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20세기 초반 이후 달리 이르는 명칭이다.
[한글(간략)] 한글이란 이름은 주시경 선연구학회 회원들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뜻은 '으뜸이 되는 큰글', '오직 하나뿐인 큰글' ,'한국인의 글자'이다.[6][10] 한글의 또 다른 별칭으로는 정음(正音),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아햇글, 가갸글, 국문 (國文) 등이 있다.
[탄생] 사용시기:1443년~현재 1443년 한글 탄생
[한글 개수] 음소문자인 한글은 홀소리(모음)와 닿소리(자음) 모두 소리틀을 본떠 만들었으며 창제된 초기에는 닿소리 17개에 홀소리 11개, 총 28개였으나, 점차 4자(ㅿ, ㆁ, ㆆ, ㆍ)를 사용하지 않게 되어 현재는 홀소리 10자, 닿소리 14자만 쓰고 있다. 한글은 표음문자 (소리글자)이자 자질문자로서 표의문자인 한자에 비해서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가 쉬 운 장점을 가지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글'이라 부른다.
[이후의 변화] 한글(훈민정음)은 창제된 이후 약 500년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한글을 무시하고 홀대했으며 연산군은 한글 사용을 탄압했다.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1942)을 조작 하는 등 한국어와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민족정신 말살정책을 펼쳤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도 주시경, 최현배 등 많은 선각자들이 한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널리 보급하려 노력하였다.
[창제 이전] 한국은 삼국 시대부터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을 써 왔다.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 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사용되었지만 한국어를 자신의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 표기법의 일원 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써 족하다 해도 한자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러한 문자 생활의 불편은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창제한 이유는?] 이러한 사조가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져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문자 혁명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취지는 세종이 손수 저술한 《훈민정음 해례본》 예의편(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로 한국어는 중국 말과 다르므로 한자를 가지고는 제대로 표기하기 어려우며, 둘째로 우 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 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고, 셋째로 이런 뜻에서 새로 글자를 만들 었으니 일상생활에 편하게 쓰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세종의 어제 서문과 정인지 서(序) 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 당시까지 한문 의존에 따른 어려움을 근본부터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창제되었다.
한편 훈민정음(이하 한글) 창제 5년 뒤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되는데,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을 중국어 원음으로 교정후 통일하기 위한 책으로서,한글을 사용하여 이 책에 수 록된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였다. 따라서 세종의 한글 창제의 목적이 한자 및 한문의 폐지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한글의 활용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글 반포] 1446년 9월에 한글이 반포되었다.세종은 한글을 창제한후에 약 3년간 실제 궁중에서 한글을 직접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다듬어 왔다.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 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했으며 1444년 2 월에 최항과 박팽년에게 <고금운회거요>의 한글번역을 명했다. 반포하기도 전에 <고금운회거요> 번역을 시켰다는 것은 이미 '한글'의 완성도는 매우 높았으며 새 문자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는 뜻으로 보인다.1445년(세종 27) 4월에는 한글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하였다. 목판본 10권 5책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어진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 된다.
한글을 반포한후에는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한글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였고,‘삼강행실’ 과 같은 국가 윤리를 한글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 두가지 사항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다.사서(四書)를 한글로 번역하게했고[39]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한글로 작성토록 했으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알려 주 도록 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한글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한 글로 글을 내리기도 했다.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한글 보급 정책에 따라 한글은 점차 퍼져 나갔다.
[종류] 기역 其役, 니은 尼隱, 디귿 池○末, 리을 梨乙, 미음 眉音, 비읍 非邑, 시옷 時○衣, 이응 異凝”, "키 ○箕, 티 治, 피 皮, 지 之, 치 齒, 而, 이 伊, 히 屎”, “아 阿, 야 也, 어 於, 여 余, 오 吾, 요 要, 우 牛, 유 由, 으 應 不用終聲, 이 伊 只用中聲, 思 不用初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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