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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고려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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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고려 침입은 1차 993년(성종 12), 2차 1010년(현종 1) 3차 1014년~1015년 (현종 5~6년)에 고려거란요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고려와 요나라는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빈번하게 행해졌다. 특히, 거란과 고려의 3차에 걸친 전쟁은 한국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993년(성종 12년) 10월 소손녕의 침입, 1010년(현종 1년) 11월 강조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요 성종의 직접 침입, 1018년 12월 소배압의 침입의 세 번의 큰 전쟁과 1015년 소적렬의 흥화진 내침까지를 통틀어 말한다.

침입 배경[편집]

거란과의 관련은 고구려 때부터이지만 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이 때에는 거란도 부족분열 상태로부터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922년(태조 5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거란에 대해서 ‘금수지국’이라 부르고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북진 정책을 실행하였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 30인은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졌고, 그 뒤에도 계승되어 고려 정종 때에는 광군 30만명을 양성하였고, 광종 때에는 서북쪽에 맹산·숙천·박천·문산 등 청천강 유역과, 동북쪽으로는 영흥·고원 등에 성을 쌓거나 군사시설을 갖추고, 또 광군을 광군사로 개편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975년에 통일을 이룩한 송나라가 985년(성종 4년)에는 고려에 한국화를 보내어 거란 협공을 제의하였다. 또한 송나라는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유민의 독립국가 정안국과 해상을 통해 내왕하며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따라서 거란으로서는 고려의 움직임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요 태종이 오대의 첫 번째인 후량과 후당의 싸움에 끼어들어 연운십육주를 얻는 등 성과를 올렸으나 끝내 중국 남침에 실패하고 급사한 뒤, 수구파와 진보파의 대립과 정치싸움으로 고려와 겨룰 여유가 없었으나, 982년 이후 정국이 안정되었다. 성종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 진화, 내원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을 준비하였다.

1차 침입[편집]

993년 5월과 8월의 두 차례에 압록강 부근의 여진으로부터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라는 통고가 있더니, 10월에 소손녕의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박양유와 서희 등을 보내 이를 막는 한편, 성종이 친히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봉산군을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왔으며, 조정에서는 이몽전을 청화사로 하여 내침의 진의를 타진케 했으나, 소손녕은 항복만 요구할 뿐 명분없는 침입이었다.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임금께서 서울의 대궐에 돌아가서 중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야 합니다. "의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부터 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의 할지론 등의 의견이 나왔고, 할지론이 대세로 굳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서희와 이지백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를 급파해 소손녕의 화친 제의에 답하였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는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략하여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을 잘 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이에 대해 서희는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이에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 통주, 구주, 곽주, 용주, 철주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 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2차 침입[편집]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하여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하자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으며 강제 출가한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의 실제적인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여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재차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요 성종은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으나 강감찬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회군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와 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3차 침입[편집]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나라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전투에서 고려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강감찬은 자주와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2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전쟁 결과[편집]

1019년 전쟁은 끝이 났으며, 이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게 되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송나라-요나라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한편 고려도 서북지역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하기도 힘들어졌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과 개경 수비를 위해 나성을 쌓았다.

한편,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이나 밀무역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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