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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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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Namespace detect/data' not found. 공 돈 ( 孔 敦, 창씨개명 : 永田 芳太郞)

(? - ?)

중국 거주 동포로, 중국 상해에 군 위안소를 경영하였다.


광복이후, 공돈은 1945년 11월 3일 상하이에 한국 부녀공제회를 설립하였다.

상하이 한국부녀회는 위안부 등으로 끌려와 중국에서 방황하던 한국여성들을 도와 귀국시키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당시 상하이 유일의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구호단체 였다.

공돈은 자기 집을 보호소로 만들어 여성들을 돌보고 사비까지 털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부녀공제회는 결성 초기 대한요리집 ‘태평루’라는 장소를 거점으로 부녀자 27명을 수용하며 활동을 시작한 조직이다.


한국부녀공제회는 활동 명분을 ‘위안부’의 보호와 갱생으로 내세웠으나, 2002년 부녀공제회를 만든 김귀락, 공돈 등의 인물이 과거 위안소 업자였음이 밝혀졌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착취하며 돈을 벌다가, 광복 직후 구호단체 활동가 행세를 하며 과거 행적을 세탁하려 한것이다.


공돈은 중일전쟁 직후, 상하이로 건너와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5년 넘게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착취해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두 달 만에 위안부 보호와 갱생을 내 건 구호단체의 창설자로 변신을 했다.

공돈은 다섯 달 짧은 활동을 끝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남겨두고 홀로 귀국한 뒤 자취를 감췄다.


한국부녀공제회가 사용한 경비가 상당함을 미루어볼 때, 위안소 업자들이 불법적으로 번 돈을 가지고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금 세탁 용도로 조직을 만들어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분석이 있다.


상하이 한국부녀공제회 명부에는

중국 지역에 강제동원됐던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들이 대부분인 831명이 수록되어있다.

명부에 따르면 수용 인원 831명 중에는 여자가 807명, 남자가 24명이었다.

지역별로는 경남이 186명(22%)으로 가장 많았고, 경북 102명(12%) 전남 98명(11.7%) 순이었다.

나이별로는 20대가 71%, 30대가 14%, 10대가 10% 순으로 나타났으며, 20·30대가 85%를 차지했다.


공돈은 위안소 운영업자였던것이 밝혀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해외 부문에 포함되었다.



참고자료

민족문제연구소 - 친일인명사전수록대상자 명단

https://www.ytn.co.kr/_ln/0103_201908160447047853_001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2/02/25/2002022570384.html

https://www.stop.or.kr/brdthm/boardthmView.do?brd_id=BDIDX_mV49maYF8r081nc63vW96G&srch_menu_nix=hn8TL907&cont_idx=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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