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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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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암서원(近嵒書院)


근암서원(近嵒書院)

❏소 재 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148-1

❏문화재지정: 문경근암서원소장유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77호(2006.01.02지정)

❏배향인물: 홍언충(洪彦忠) 김홍민(金弘敏) 이덕형(李德馨)

이 구(李 榘) 홍여하(洪汝河) 이만부(李萬敷)

권상일(權相一)

❏창건연도: 1544년(중종 39)

❏향 사 일: 음력 3월 상해(上亥)


연 혁

본 서원書院은 처음 1551년(명종明宗6)에 상주목사尙州牧使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선생이 세운 18서당의 하나인 영빈서당이 그 모태로 고노古老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현촌縣村 천변창사남川邊倉舍南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산양창의 남쪽 10리 지점에 해당되는 지점이라고 하였다.

처음 이 고장 출신으로 甲子士禍에 피화되어 해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선생을 모시기 위한 사당을 짓겠다는 논의가 이루어져 활재活齋 이구李榘가 계사癸巳년 4월에 상주목사에게 정문呈文을 올리고 이어 갑진甲辰년 7월에 부사를 역임한 전명룡全命龍이 다시 정문呈文을 올려 관의 승인을 받아 1665년(현종6)을사乙巳에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을 배향하여 향현사鄕賢祠가 되었으며 그 후 4년 뒤인 1669년(현종顯宗10) 을유己酉에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을 추배하고 예조의 허가를 받아 서원書院으로 승원陞院하였다.

1702년(숙종28)에는 사담 김홍민沙潭 金弘敏,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 두 선생을 추배하고 1786(정조10) 병오丙午에 활재 이구活齋 李榘,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 세 분 선생을 배향하여 7현사가 되었으며 묘호는 경모사景慕祠, 원호院號는 근암近嵒이다. 근암서당近嵒書堂의 현액懸額 글씨는 장문당藏文堂 원진해元震海(1594-1651)의 글씨인데 서원으로 승원陞院 하면서 “원院”자를 조시호曺時虎가 고쳤다고 한다.

흥교당興敎堂과 주일재主一齋의 글씨는 상주목사를 역임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龍의 글씨이고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岺이 지나다 이곳에 들러 지은 시판의 글씨는 교관 신명전敎官 申命傳의 글씨이며 지원루知遠樓 욕인재欲仁齋 유의재喩義齋의 현액懸額은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가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와 이산서원원규伊山書院院規는 처사 오상원處士 吳尙遠의 글씨이다. 1870년(고종高宗7)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毁撤되고 다시 복원하였다.


(현現 근암서원近嵒書院 현액懸額은 1982년 중건 때 퇴계 이황선생退溪 李滉先生의 14대손인 처사 성암 이원기處士 星庵 李源箕선생이 썼고 2011년 중건 때 탁본하여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암 이원기 처사의 14세 때 쓴 글씨라고도 전한다)


* 연표

- 1551년(명종5) - 영천 신잠 목사가 영빈서당을 세움)

  (1544년(중종39) 근암서당 창건)

- 1653년(효종4) - 4월에 활재 이구 등 사림에서 우암 홍언충을 배향하는 향현사 건립을 상주목사에게 청원

- 1664년(현종5) - 부사를 지낸 전명룡 등이 다시 정문을 올려 관의 승인으로 우암 홍언충을 배향하는 향현사 건립승인

- 1665년(현종6) - 우암 홍언충을 배향

- 1669년(현종10) - 한음 이덕형 추배. 서원으로 승원

- 1702년(숙종28) - 사담 김홍민, 목재 홍여하, 두분을 추배

- 1786년(정조10) - 활재 이구, 식산 이만부, 청대 권상일의 세분 선생을 추배하여 배향선현 은 7현이 되었다

- 1870년(고종7) - 서원 훼철毁撤令에 의해 훼철毁撤

근암서원은 지난 1970년대 후학들에 의해 사당과 강당이 일부 복원됐지만 과거의 모습에 비하면 규모면에서 매우 축소되는 등으로 서원 기능을 잃었었다.

문경시는 최근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4천766㎡에 총사업비 30억원을 들여 사당과 전사청, 강당, 내삼문, 동재, 서재, 누문, 관리사 등 모두 9동으로 근암서원 복원을 마치고 2011년 완공하였다. 게제된 사진은 근암서원 준공 낙성 고유행사 장면들이다.


배향인물

1)홍언충(洪彦忠, 1473~150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직경(直卿), 호는 우암(寓菴). 득우(得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손(孝孫)이고, 아버지는 참찬 귀달(貴達)이며, 어머니는 김숙정(金淑正)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또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질정관(質正官)·부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1503년 수찬(修撰)으로 복직해 교리(敎理)가 되고, 그 해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되었다. 이어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또다시 거제도(巨濟島)로 이배되었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유배의 명을 받았을 때 몸을 피할 것을 권했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다 해 조용히 길을 떠났다. 해도에 이배 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천성이 신중하면서 솔직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만사 自挽辭≫가 있다.


2)김홍민 (金弘敏, 1540~159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임보(任甫), 호는 사담(沙潭). 예강(禮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윤검(允儉)이고, 아버지는 옥과현감 범(範)이며, 어머니는 찬녕조씨(昌寧曺氏)이다. 홍미(弘微)의 형이다.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삼사(三司)를 거쳐, 1584년 이조좌랑으로 삼사와 같이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였다. 사인(舍人)에 이어 1590년 전한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규합하여 충보군(忠報軍)이라 칭하고 상주에서 적의 통로를 막아 적군이 부득이 호서지역으로 통행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중년 이후로 주자서(朱子書)와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을 탐독하였고 역학에도 뜻을 두었으며, 역사서로는 주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읽었다.


3)이덕형(李德馨, 1561~16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부사과(副司果) 수충(守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 진경(振慶)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민성(民聖)이며, 어머니는 현량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해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한다.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만나보고 싶어했으나 사적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였다. 이듬 해 서총대의 응제(應製)에서 장원을 했고, 이 외의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 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 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했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했다 한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했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했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란 중 줄곧 같이 행동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다. 그 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했으나 본인의 사양과 시기하는 자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4)이구(李榘, 1613~1654)

자는 대방(大方), 호는 활재(活齋)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괴산 재월리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에서의 항복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한 성리학자이다. 학문적인 성향은 이황의 이기설을 따르고 이이의 학설을 반박하였으며, 논설에서는 주자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다. 저술로 󰡔활재집(活齋集)󰡕이 있다.


5)홍여하(洪汝河, 1621~167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경삼(景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덕록(德祿)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호(鎬)이며, 어머니는 고종후(高從厚)의 딸이다.

1654년(효종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는 ≪주역구결 周易口訣≫·≪의례고증 儀禮考證≫·≪사서발범구결 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 彙纂麗史≫·≪동사제강 東史提綱≫·≪해동성원 海東姓苑≫·≪경서해의 經書解義≫ 등이 있다.


6)이만부(李萬敷, 1664~173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관징(觀徵), 아버지는 예조참판 옥(沃)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승지 동규(同揆)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받았고, 지취(志趣)가 고상하였으며, 정주학(程朱學)에 심취하였다.

1678년(숙종 4) 15세 때 송시열(宋時烈)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탁남(濁南)에게 몰려 북청(北靑)에 유배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시봉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 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누대(累代)를 서울에서 살았으나 영남의 학자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그곳에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과 풍속교화에 힘쓰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1729년(영조 5) 학행(學行)으로 장릉참봉(長陵參奉)과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는 평소에 주염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주자(朱子) 등 5현(賢)의 진상(眞像)을 벽에 걸고 존모하였으며, 이황(李滉)을 정주학의 적전(嫡傳)으로 존숭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적인 견해도 주리적(主理的)인 경향을 보인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 문집인 ≪식산문집≫ 20책 외에 ≪역통 易統≫ 3권, ≪대상편람 大象便覽≫ 1권, ≪사서강목 四書講目≫ 4권, ≪도동편 道東編≫ 9권, ≪노여론 魯餘論≫ 1권 등이 있다.


7)권상일(權相一, 1679~1759)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상주의 근암리(近菴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심(深)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로 부사 달의(達意)의 딸이다.

학문을 일찍 깨우쳐 20세에 옛사람들의 독서하는 법과 수신하는 방법을 모아 <학지록 學知錄>을 저술하였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전적·직강 등을 역임하고, 1720년 예조좌랑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병조좌랑을 지내고, 1727년(영조 3)에는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해 영문에 보고하고, 난을 토벌해 공을 세웠다. 1731년 영암군수와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733년 양산군수·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퇴계언행록 退溪言行錄≫을 교열해 간행하고, 이듬해 상소해 민폐 근절책과 관기숙정 방안을 건의했다. 홍문관의 계청에 의해 경연에 참석해 소신을 진술했다. 그 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창립해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공씨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등 선치를 하였다.

1741년 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시정, 이듬해 사헌부헌납·사간원사성·사헌부집의·동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판결사(判決事)·홍문관부제학·한성좌윤·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황(李滉)을 사숙해 <사칠설 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 18권, ≪초학지남 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 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 昭代備考≫·≪가범 家範≫·≪역대사초상목 歷代史抄常目≫과 ≪일기 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근암서원(近巖書院)에 향사되었다.


건축물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인 3칸의 경현사(景賢祠), 4칸의 강당, 신문(神門), 4칸의 고자처(庫子處)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홍언충과 이덕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양쪽에는 김홍민·홍여하·이구·이만부·권상일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문경시는 엄원식 학예사 등이 앞장서서 최근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4천766㎡에 총사업비 30억원을 들여 사당과 전사청, 강당, 내삼문, 동재, 서재, 누문, 관리사 등 모두 9동으로 구성된 근암서원 복원을 마치고 2011년에 준공하였다.


중요물건

1)문경근암서원소장유물-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77호(2006.01.02지정)

지난 2006년 1월2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문경근암서원 소장유물은 총 843점으로 교지(敎旨) 63점, 첩지(牒紙) 4점, 영지(令旨) 4점, 전지(傳旨) 1점,증시(贈諡) 1점, 󰡔청대일록(淸臺日錄)󰡕 12책 등이다.


편액관계

ㅇ 지원루知遠樓 - 원대한 꿈을 가지라는 의미 2층 누각에 8작 지붕. 식산 이만부가 썼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음. 현재의 것은 2011년 중건 때 농곡 조용철聾谷 趙庸澈이 썼다.

ㅇ 욕인재欲仁齋 - 근암서원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 공간 (동쪽)

ㅇ 유의재喩義齋 - 근암서원 유생들이 기거하덩 기숙 공간 (서쪽)

식산 이만부가 썼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의 것은 2011년 중건 때 경암 김호식이 썼다.

ㅇ 근암서원近嵒書院 -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강학 공간.

서원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며 정면 5칸 측면 2칸 반 팔작지붕 겹처마로 되어있다.

처음 서당 때 장문당 원진해(1594 - 1651)썼고 승원 후에는 당堂자를 원院자로

조시호가 개서했다. 그러나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의 것은 1982년 중건 때 퇴계 14대 직계손인 진성眞成 이원기李源箕가 썼다. (14세 때 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ㅇ 전교당典敎堂 - 강당 내 동편에 있는 방으로서 행사시 원장 및 헌관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

ㅇ 주일재主一齋 - 서당 때 선원 김상용(1561 - 1637)이 상주 목사 때 전서로 썼다.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의 전교당典敎堂과 흥교당興敎堂은 2011년 중건 때 심정 황규욱이 썼다.

ㅇ 경현사景賢祠 - 7현을 배향하는 사당.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맞배지붕 겹처마로 되어있다.

ㅇ 전사청典祀廳 - 제례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는 곳. 사당 옆에 있으며 향교, 서원, 문묘가 일치하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구성 되어 있다.

ㅇ 내삼문內三門 - 사당 영역과 강당 영역을 구분하는 문.

ㅇ 제영題詠 - 서당書堂 때 백담百潭 구봉령具鳳齡이 읊었다.


근암서원 소장 유물

2006년 1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7호로 지정 되었으며 일괄 834점이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우암 홍언충, 목재 홍여하, 청대 권상일의 목판 문집이 대부분이고 청대

권상일의 교지, 첩지, 영지가 70여점 있고 청대 권상일 선생이 평생을 수집한 서책과 기록

물 중 이퇴계 선생 친필, 청대문집, 어제어필 등은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근암서원 소장유물목록(일괄-834점)- 근암서원 문화재

- 청대일록 淸臺日錄: 12책(1702 숙종 28 - 1759 영조 35) 50여 년간 일기.

- 괴원계첩 槐院稧帖 : 1책(1712 숙종 38)

- 낙원기영회첩 洛院기英會帖 : 1책(1724 경종 4)

- 황명대통력 皇明大統曆 : 1질(영조연간)

- 어제대훈 御製大訓 : 1질(1755 영조 31)

- 광국지경록 光國志慶錄 : 1권(1744 영조 20)

- 성학십도 聖學十圖 : 1질(1744 영조 20)

- 퇴도선생필첩 退陶先生筆帖 : 1질

- 청대만음 淸臺漫吟 : 1질(1724 - )

- 근암동상하계안 近嵒洞上下稧案 : 1질(1700)

- 동국통간제강 東國通鑑提綱 : 133매(영순면 율곡리)

- 목재선생문집 木齋先生文集 : 228매(영순면 율곡리)

- 우암선생문집 寓菴先生文集 : 49매(영순면 의곡3리 청산재)

- 청대선생문집 淸臺先生文集 : 326매(산북면 서중리 148-1) 등.


근암서원문루중창상량문

(近嵒書院門樓重創上樑文) 撰 金楷


이 서당은 옛 제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바야흐로 서까래와 대들보가 썩고 부러질까 걱정이 되었다. 화려한 대문이 가을바람에 활짝 열리니 갑자기 집(棟宇)이 넓고 시원하게 보인다. 많은 사람들(燕雀, 도량이 작은 사람을 비유)은 서로 낙성을 축하하고 선비들은 기뻐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현인(賢人)들을 존경하여 사당을 세우는 일은 실로 선비들을 길러내고 학문(學文)을 일으키는 일이다. 엄숙하고 훌륭한 사당은 이미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이 절실한 듯하고, 훌륭한 많은 선비들은 편안히 놀며 쉴(遊息, 놀면서 쉼) 곳이 없다.

형산(衡山)1)의 작은마을(小邑)에는 아직도 여러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강당이 남아 있지만, 한(漢)나라 왕실의 조정은 일찍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학교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본래부터 중요한 요새에는 마땅히 높은 누각이 있어야 했다. 이 고을(州)은 명사(名士)들이 여남(汝南)2)과 같이 많이 배출되었고, 좋은 말이 기북(冀北)3)에서와 같이 많이 나왔다. 유현(儒賢)들의 배출은 고인(古人)들의 훌륭한 행적들을 선 후대(先後代)에 계속 이어지게 하였고, 원우(院宇, 書院 祠宇등의 총칭)가 서로 가까이에 있음은 원근(遠近)의 현에 유풍(遺風)을 떨치게 하였다. 곧 대교(大橋)의 경계인 낙동강 상류, 지명이 죽림(竹林)인 곳이 어찌 진(晉)나라 선비촌과 같이 방달(放達, 거리낌이 없이 함부로 함)해 질 수가 있겠는가? 명사들이 절개를 지키는 것은 곧고 바르게 행함이 예효(豫爻)에 꼭 들어맞는다.

선배(先輩)들은 현인들에게 제사드릴 것을 논의(論發意)하여 비로소 서당(書堂)을 승격하여 서원(書院)을 만들었고, 후배들은 선배의 뒤를 쫓아 덕업(德業)을 숭상하며 또 추가로 배향(追配)하여 합사(合祀)를 하니, 한 나라의 유종(儒宗)이자 영재(英才)가 아닌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 서원(書院)에 같이 열좌(列坐)하여 모시게 되었다.

유학자들의 성대한 사업은 고금(古今)을 통달하고 있지만, 수가 적은 우리로서는 성심으로 규범을 다하였으니 후회는 없다. 다만 초창기의 탄력(殫力, 모든 노력)으로는 능히 공력(功力)을 다하여 집을 짓지를 못하였었고, 몇 칸의 작은 집은 오직 서열을 서로 등한시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오랜 비바람으로 인해 집이 기울어지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형세(形勢)를 굳건하게 바꾸고 새롭게 하려고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한번 해봅시다. 괜찮다.”

라고 말은 하였지만 그 뿐이었다. 동네 어른과 사림(士林)의 종장(宗匠), 그리고 문중의 뛰어난 선비들이 비로소 용지(龍池) 못에서 연꽃을 꺾어서(과거에 급제하여) 겨우 운로(雲路)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자(출세 길을 걸음), 늦도록 상령(商嶺)에서 지초를 먹으며 오래도록 유석(儒席)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다. 이 누각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니 슬퍼하고 한탄만 하는 것으로는 여러 현인들을 이곳에 모을 수가 없으므로 논의를 하여 지붕을 고치고 손질을 하기로 하였으나 이 계책은 마음속의 계획에 불과하였다.

갑자기 눈앞에 우뚝 솟은 집이 나타났다. 하관(下關)과 상각(上閣)은 곧 옛 법도 그대로 여서 바꾼 곳이 없다. 북쪽은 줄이고 남쪽은 늘려 지세에 따라 약간 크게 하니, 나아가고 물러남에 넉넉하여 참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에 지장이 없고, 앉고 일어나는 데에 방해를 받지 않으니, 방은 좁아도 편안함을 느낀다. 창문이 활짝 열리니 바야흐로 달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음을 알겠고, 처마 끝이 높게 올라가니 비로소 멀리서 바람이 불어옴을 알겠다. 강산은 한층 더 아름다움을 배가(倍加)하고, 풍경(風景)은 여러 형태로 아름다움을 도와준다.

 이것은 사람을 얻음에 있으니, 이런 것을 제대로 잘 변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선비가 됨에는 길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놀다가 심성(心性)을 잃기도 하나, 본성 밖에 원래 다른 것이 없으니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을 안으로 돌이킬 뿐이다.

명교(名敎, 儒敎의 이칭, 老子의 無名의 가르침에 대한 상대어) 속에 절로 즐거운 경지(境地)가 있는데 딴 곳에서 찾으리오. 만약 자기 집에서 인(仁)을 닦고자 한다면 어찌 이곳에서 이 누각을 보지 않겠는가? 그 처음에 신명이 버려두어 오래도록 비워 있음은 자신이 정성(精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 것이 없다. 문루를 다시 새롭게 고치니 이 정성(精誠)이 우리들에게 있게 된다. 사방의 문을 여니 본래의 모습 훤히 드러나고, 팔방의 창문을 여니 밝은 빛이 보인다. 이것은 도리가 항상 있음이고 그 법칙(法則)이 멀리 있지 않음이니, 얼레래 라는 노래 가락으로 상량하는 일을 돕고자 한다.


얼레래 상사디야 대들보를 올릴 적에 동쪽으로는

긴 강물이 대교 가운데로 힘차게 흐른다.

어부 노랫소리 들리는 곳에 농부 노래로 답하고

그 속의 한가함과 바쁨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네.


얼레래 상사디야 대들보를 올릴 적에 남쪽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 없이 가지런하구나.

때때로 산 넘어 미풍이 불어오고

높은 하늘에 구름 걷히니 하늘이 쪽빛 같네.


얼레래 상사디야 대들보를 올릴 적에 서쪽으로

때마침 산봉우리에 나지막이 달이 지고 있다.

산신령은 생각이 있어 볼거리 제공하고,

동쪽 교각 열어놓고 시냇물 흘려보내네.


얼레래 상사디야 대들보를 올릴 적에 북쪽으로

고목나무가 푸른데 실처럼 가늘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희구나.

수북산인(石洪)은 지금 어디 있는가?

높은 산봉우리 비어있어 쓸쓸하고 적막하구나.


얼레래 상사디야 대들보를 올릴 적에 위쪽으로

단정하고 엄숙한 사당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본다.

성현(聖賢)되길 바라는 것은 성인이 도모하는 바이나

이와 같이 할 일이 있음은 우리들을 슬프게 하는구나.


얼레래 상사디야 대들보를 올릴 적에 아래쪽으로

소나무들이 이 땅을 얻어 좋은 빛을 더해가고,

때를 만나 높이 솟아 명당(明堂)을 부축하니,

사당과 잣나무는 긴 세월을 같이 할 것이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을 올린 후에 덕(德)에 들어가는 데에는 문이 있으니 편한 곳에 몸을 두고자 한다면 누가 능히 이 문을 통하지 않고 나올 수 있는가? 마땅히 가야할 방향을 알고 또 수양과 모범의 집을 말하려 하나니 스스로를 사랑하는 뜻에 힘쓸지어다.


近嵒書院講堂重修上樑文 高裕

凡天下之事有廢則興在學者之功又新爲貴仍舊之貫于古而光竊惟樹谷名區厥有竹林古塾彼僧術者獻能於相地之功昔賢憂之盡力於

經亂之日是以有制作因之爲依歸山之陽好風光攬結而爲室嶺以南諸名勝容裔乎其間會友之意甚勤講道之具略備以罔巒之體勢則王

依雲達顧衿帶之形勝則茂林晴川拱揖乎凡案隱約乎軒窓于時言言所言經史子集各自勉勉所勉道義文章先輩爲已之誠後學遊藝之所

及至四先生合食之後事體加隆惟我二三子盍簪之時齋蠲得所沿革有數不改太白之龍蛇春秋幾何曾經大明之日月千年桑海之淚一區

絃誦之聲由來繕修幾更益知古人之勤篤中間潤色漸備庶免後生之咨歎居然星霜之屢經又見風雨之交華瓦墁爲之滲漉未免地勢之矮

湫椽桷因而傾挫難保屋漏之平正君臣父子長幼之道非不講明在心禮樂射御書數之文[주:二字缺]論說無地爲是懼也相與圖之撓奪爲難授規於三農之隙排布已定八手於一歲之餘小民用力大民用心不異辭而趨事南山有松北山有柏如待時而效材乃是日之良忽如苞而起堂室軒楹之齊整不費新工棟字杗桷之毀傷稍改前作存其制而去其甚不失通變之規作於古而述於今允合傳授之義弊予改矣顧何論於亟徐

因以葺之亦自中於程度夫誰曰草堂無色乃然後靑衿有辭翠岳寒溪依舊色於窓外靑編黃券餘古方於人間吾師有言嗟我後輩小子何述

惟昔先民敢控巴歌庸贊奚作拋樑東天空來去碧灣中待他些滓消融後抵掌相看無極翁拋梁南鬱鬱長松翠色含最是北風天雨雪心期磊

落與君參拋梁西君子峯頭小步迷正路要領平踏去不容人世有千蹊拋梁北高高天柱通天極出門一步試攀躋萬丈巖崖不可陟拋梁上纖

雲散盡兩輪朗吾心尙着一毫欺皇矣上帝何以仰拋梁下淸簟明窓淨掃灑吾黨諸君盍勉旃有書不讀何爲者伏願上樑之後士趣益勵儒術

復興㝢庵漢陰沙潭木齊諸大爺蓋嘗示我顯德性理文學志節事業皆吾分不必讓與別人


정와선생문집 (靜窩先生文集)

近嵒書院廟宇重修上樑文 ( 近嵒書院廟宇重修上樑文 )

七賢共一堂、政仰氣類之相感、新樑增舊制、聿覩閒架之頗寛、半畝儒宮、百世吾道。恭惟寓菴洪先生、受天正氣、爲世名賢、萬事悠悠、只付天、乃知見得高養得厚、神理茫茫不可曉、胡爲厄其身、嗇其命、直節炳如日星。已有前人之備述文章、昭在耳目、何容後生之揄揚、漢隂李先生、邦國著龜、儒林山斗、跋太極之圖說、瞭然理氣原頭、恢宇宙之經綸、蔚乎宰相勳業。頻承委任之命、旣效鞠躬盡瘁之誠、屢上致仕之章、益堅難進易退之志。沙潭金先生、胸懷瑩如冰照、容儀益如春溫、孝友篤於處家、允出天性、忠愛切於爲國。累承聖褒、篤好節要。及近思專意、居敬竆理之學、尤喜大易與綱目、洞見治亂消長之幾。木齋洪先生、明睿超卓之姿、通博篤實之學、經書口訣、是羣蒙質疑之格言、邦禮血䟽、實百王不易之大法。得正宗於朱書、溪訓、辨闢陸氏氣質之偏。嚴筆削於彙、纂提綱、援據孔子春秋之例。活齋李先生、山陽處士、海東名儒。隨分聽天、確乎固竆不移之操。讀書求志、展也眞知實得之工。性命精微證朱說、而推演理氣、蘊奧引溪訓之發揮。息山李先生、徵士高風、吾儒宗匠。無意科場事、戒循欲而蕩情、潛心聖賢書、邁進德而修業。日令所著、殆同南塘夙夜之箴、道東諸篇、克闡前輩性理之學。淸臺權先生、修明正學、自任斯文、常對方冊中聖賢要爲、反躬體驗、克篤性理上工業、諦得造道。精微論思、啓沃之訏謨、幾承嘉歎之聖批。淸信孝敬之實行、宜徵拙纂之遺篇。惟玆七先生、風聲俱是一邦人師表、緬羣賢之輩出。雖世代遠近之不同、幷此鄕而蔚興、况道學造詣之相、沕百世下、孰不立懦一廟、中允宜妥靈肆、昔就寓菴獨享之祠、祇奉漢隂、沙潭、木齋而並設。又今因多士齊發之議、敬承、活齋、息山、淸臺而追躋。第有廟制、不廣之歎、自多享時、未安之節。重修改作、非不每日經營、事巨力綿、以至累年遷就。今纔鳩材出力、方始興役、董工樑楣、易以新制、度翼然宏敞。柱椽因其舊丹臒美哉。奐輪豆籩、錯陳之間、豈不恢恢有裕、灌獻周旋之際、其將秩秩無愆。將擧脩樑、聊陳善頌。伏願上樑之後、文風益振、儒術大明、指古賢、而爲期咸成忠孝之行、仰前修、而取法益尙節義之風。盛服齊明、永奉千秋、俎豆之享、執經講討、不徹四時絃誦之聲。


漢陰先生文稿附錄卷四


[奉安文]

近嵒書院奉安文 洪汝河撰

盛朝流煕。釀元涵精。維是先生。應期而生。祥順其資。閎偉其器。性理之學。經濟之志。黼黻之文。亦韡其英。陳謨發令。賁我休明。裒然德首。循蹈規矩。殆天降任。太平是輔。國運中否。海寇以猘。維時先生。一死以誓。哭秦出師。單騎赴虜。奔走禦侮。折衝樽俎。方晉宗向。比鄭僑皮。名聞華夏。威讋南夷。非先生生。國僕誰起。天降先生。意實在是。黑頭大拜。正色垂紳。巍巍堂堂。爲國宗臣。狂昏顚覆。邪議盈庭。先生曰噫。我死則寧。賢相有諷。得無傷勇。先生曰否。我心如烘。義有舍生。忠或祈死。彝倫先正。校績愈偉。嗚呼先生。兩有武文。不爲聲章。不居崇勳。有政有事。有言有烈。具玆衆美。統于大節。粤稽聖制。曷後明禋。遺澤未斬。嗟我邦人。腃玆近嵒。溪涵岳峙。釣遊不及。桑梓密邇。維昔寓庵。爰有舊廟。曠世神交。肝膽相照。同室妥侑。德將在斯。衿紳濟濟。卒度禮儀。假我虔誠。歆我粢盛。以揭彝則。以永厥聲。


漢陰先生文稿附錄卷四

[奉安文]

近嵒書院影幀奉安文 鄭必奎撰

於惟先生。元龜大東。德崇業廣。學䆳位隆。靑年文衡。黑頭相公。奠安宗社。輔導聖躬。太常旂立。儒林望顒。眞像遺幅。湖月塘蓉。正大有儼。武侯之忠。丹靑莫牀。晉公之衷。百世儀圖。八路攸同。惟我嶠南。尤切山宗。矧玆近嵒。妥安靈宮。梓縣樹老。桐鄕水淙。京第遐邈。無緣致悰。嗣孫奉幀。來莅于龍。天若相佑。地接疆封。多士秖迎。卜日告功。雲洞規倣。龍淵例從。宛承警欬。儼設幪屛。晦翁遺像。況安東楹。斯文月光。冠佩肅雍。時固有待。一理感通。先生陪護。佑我無窮


息山先生文集附錄[上]

奉安文

近嵒書院奉安文 柳宗春

吾道之南。師儒世作。抽關啓鍵。牖我蒙學。斯我先生。應期挺生。承襲前人。詩禮鯉庭。弱齡志願。已在閩洛。無文不涉。無理不覈。博而積之。旣涵旣秩。亦旣蹈之。見卓行立。卷而南遷。山與俱息。日工時程。敬準誠的。文編道東。受用之切。精發易統。究竟之法。㫌招一謝。歸袂翩然。樂我初服。與道周旋。山頹一夕。士淚沾裳。德有其鄰。學不異方。推身及物。礪世磨俗。鄕申呂約。塾遵程目。名敎之中。砥柱功卓。畏壘議起。疇不曰宜。惟玆嵒院。四賢舊祠。時雖相 後。道則揆一。同堂揭虔。曠世休匹。羣謀允叶。鄰牘齊發。辰良日吉。衿佩紛集。像位有儼。德將在斯。靈應啓佑。庶幾格思。


常享祝文 柳宗春

功成日令。敎在道東。進修交至。百世攸宗。

息山先生文集附錄上


息山先生文集附錄[下]

祭文[近嵒書院儒生李翊春等]

猗歟先生。資稟溫雅。神氣淸爽。如蘭之芳。如月之朗。爰自弱冠。絶意聲利。乃希聖賢。乃讀經史。孜孜兀兀。以夜繼日。牢籠百態。竆探萬物。中移于嶺。惟 我商鄕。右伊左洛。君子宜藏。我琴我書。我瓢我簞。不皺其眉。有好其顔。樂玆在玆。終老相羊。道義之林。詩禮之場。旣積于躳。乃著于文。盈箱溢案。不朽之言。幽香遠播。㫌招累至。隱見以時。出處惟義。年德俱卲。望實愈尊。吾道有托。後學踵門。維玆山陽。亦襲輝光。小車時來。于院之堂。章甫環侍。或左或右。講榻儼開。乃傳乃受。答問之詳。論討之明。指以正路。勉以新功。不怠不厭。眷眷于中。只祝康寧。永期遊陪。斯文遽厄。樑木其摧。追惟往昔。孰不興哀。齋瞻欲仁。樓仰知遠。遺躅如昨。來者可勸。斂此 屨杖。就彼幽壙。手拈瓣香。敬爲先生。數行之文。多士之情。不昧洋洋。庶歆明觴。


운계문집 (雲溪文集)

近嵒書院次[崔時應]韻 ( 近嵒書院次[崔時應]韻 )

三峯環翠玉屏開。堂宇新成數仭嵬。儲養豈無資質美。提撕須用本根培。存誠只是惺匚法。造化元非物匚裁。擿埴如今尋路徑。正要收放入身來。


近嵒書院效蘓州體呈高善承丈[戊寅] ( 近嵒書院效蘓州體呈高善承丈[戊寅] )

回首平生一夢甜。桑楡飽煖稻魚兼。憂時謾說三年艾。涉世眞同六日蟾。凡鳥久知題竹戶。幽禽相近語芧簷。不妨随處閒生活。坐數溪西暮笛尖


인재선생실기 (忍齋先生實記)

近嵒書院道會通文[丙午十一月日]] ( 近嵒書院道會通文[丙午十一月日]] )

恭惟我忍齋權先生。禀籣雪之姿。蘊圭璧之章。行修德孚。令聞夙著。出入溪門。親承旨訣。其經學之精明。踐履之䔍實。大爲同門諸賢所推重。廣開書塾於伊溪之上。以訓廸後進。爲己任。誘掖奬勵。成就甚多。今於溪門錄及月川先生年譜。可考而先生五子。皆贒。松巢震峯二愚。諸公。承襲趾美。聲譽在世。淵源有自。授受端的。益驗於家學矣。於戱。先生德行志業。如是巍卓而迄今百年之間。畏壘崇奉之擧。尙此未遑於貴鄕。此實斯文之欠典而吾黨之所共慨鬱者也。玆因近院躋享時道會之日。輿論共。發仰陳祭社之意。㐲惟責鄕僉君子。好德之誠。必有倍簁於隣鄕。思所以亟圖之。千萬


정와선생문집 (靜窩先生文集)

活齋李先生近嵒書院追享奉安文 ( 活齋李先生近嵒書院追享奉安文 )

大道已衰、正學幾晦。各尊所聞、異言喧豗。於休先生、豪傑天資。海東名儒、山陽處士。竆居篤學、眞知實得。獨尋正的、直排異學。理氣幽奧、性命精微。推演朱說、發揮溪旨。或書辨證、或圖揭示。見何精到、論何的確。十條嘉謨、亦見忠愊。一區桑鄕、百世遺風。俎豆盛禮、嗟哉未遑。凡在後學、詎無崇報。睠玆嵒丘、四賢攸妥。炳然忠節、蔚乎道義。矧玆木老、先生心友。一氣相感、臭味同孚。候誰幷躋、息老臺叟。學術德業、異世同道。一堂腏食、禮意攸當。玆簡吉辰、敬奉躋享。靑襟坌集、禮儀翼翼。千秋妥靈、報祀無斁。


蘆洲先生文集卷之三

祝文

近嵒書院追享時告由文 院舊享洪寓庵,李漢陰兩公。壬午夏追配洪木齋,金沙潭兩賢。

道東千載。鍾英嶺右。繼世生贒。流芳前後。緬惟寓庵。稟得正氣。承家文行。立朝英偉。逢時不祥。禍患斯極。處困而亨。信道尤篤。遺風餘韻。久而愈慕。俎梪于玆。卅有年所。粤若漢陰。生爲社稷。當亂哭秦。請兵卻敵。逮乎昏朝。彝倫斁絶。忠憤所激。捐生不惜。堂堂大節。矜式後人。次第揭虔。並享精禋。風聲以樹。崇報允宜。斯文在玆。多士攸依。維德有鄰。魯多君子。今躋二贒。實出公議。沙潭孝忠。敬深鄕黨。木老儒宗。世所歸仰。同堂妥靈。曠代儷美。昭明精爽。相感彼此。不顯其光。世德益彰。其盛矣乎。如在洋洋。辰良日吉。祀事孔明。歆此粢盛。格我虔誠。


문서명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계미년 9월에 근암서원에서 병산서원에 보낸 통문(通文)

발급자 근암서원 近嵒書院

수급자 병산서원 屛山書院

간행세기 미상

문서크기(cm) 105.8×69.3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원소장처 풍산류씨 하회 화경당(북촌댁)

通文右文為奉告事。㐲以天道好還。日月昭晣。樊菴蔡先生伸理之命。特下扵覆盆之中。有識傳聞。交相慶賀。盖不獨為樊翁地也。吾嶺結轖之情。一朝氷釋。區區忻抃之餘。継以有獻愚之忱。苐㐲念先生載道之器。曾被[대두1]先朝睿勘。而宸章寳墨。弁之卷首。則登梓刋布。昭恵後世者。為今日吾黨之所汲汲宣力。而伊山一會之後。終未闻始役之舉。雖未知中间事㡬之有甚莭拍然。固知貴院及廬江三溪之經紀刋役者。業有年所。僉尊之獨任賢勞。固已欽仰。而玉扵剞劂之役。則鄙䓁亦冝同心而并力。兹因齋會。敢陳瞽見。望須趂卽妃事。以為指日通告之地。幸甚。右文通屏山書院癸未九月十二日。近嵒書院院長姜鳯欽。齋任蔡繼禹。申櫓東。熊淵書院院長李誠之。齋任高夢礪。蔡光禹。會貟權體仁。洪竒黙。蔡濟東。權達清。蔡興東。李敬陽。蔡羽東。權祿仁。蔡晟東。曺益溥。權迪。蔡榮東。權暹。李瑞陽。權樂仁。蔡昌禹。生貟權世永。蔡崇東。權逸。卞英發。鄭必佑。權速。蔡周郁。李寕壽。蔡鼎禹。李觀顯䓁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근암서원 발간 책자

대학원D1-A384-1-2 卷1-4

표제/책임표시사항 寓菴先生文集 : (幷)附. 卷1-4 / 洪彦忠(朝鮮) 著

판사항 木板本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近嵒書院, 肅宗 46(1720)

형태사항 4卷2冊 ; 31.5 x 20.6 cm

주기사항 序: 上之四十有六年己亥(1719)...權斗經序

跋: 萬曆壬午(1582)六月...金宇宏謹跋, 庚子(1720)三月...玄孫相民謹跋

墨書: 閼逢군灘(甲申)암院印送


근암서원 제향 시 축문

(近嵒書院常香祝文)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 축문


하늘이 현인을 탄생하게 하여 본체와 현상을 일찍 이루셔서

나라에 공을 세우셨으니 백성들이 은택을 입으리라.

天爲生賢 道器夙成 功存社稷 澤洽生靈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 선생 축문


학문은 가정을 이룩하고 도는 효도와 우애의 근본이니

선생의 언행의 자취는 영원토록 후세의 사표가 되리라.

學成家庭 道本孝悌 蹟夫言行 可師百世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선생 축문


뛰어나게 총명한 자질은 그의 학문을 독실하게 하였고,

말이나 글을 아름답게 꾸며서 그 참됨을 세우고

유학의 기준에 알맞게 하셨도다.

穎悟之姿 篤實其學 修辭立誠 斯文準的










 


참고-경북서원지

경북일보 http://www.kyongbuk.co.kr/

지방자치 네트워크 http://www.kyongbuk.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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