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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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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정 사건(金淇正事件)>>

1927년 3월부터 1928년 12월 13일까지 경남도평의원 김기정의 징토사건으로 김원석, 최천, 황봉석 등 3차에 걸쳐 33명이 수감되어 대구고법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통영시민 연인원 1만 여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이 사건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김기정의 언동을 통박했다. 통영의 김기정 사건은 여타지역에서 보기 드문 전지역적인 항쟁이었다. 즉 제2의 3․1운동이었다. 이 사건은 김기정의 망언에서 시발됐지만, 제2의 원인은 경찰측의 경거망동으로 김원석을 그날로 예심에 넘긴 것이었다. 이렇게 지펴 올려 진 통영지역의 김기정 배척운동은 점차 항일운동으로 전환하게 됐다.


1927년 3월 15일 이른 아침 김원석(金元錫)이 매족상습범 김기정을 징토하노라 라는 제하의 유인물을 통영전역에 살포했다. 전단에는 “김기정은 도평의회 석상에서 보통교육을 폐지하라. 조선은 교육으로써 망국했다. 조선어 통역을 철폐하라는 황당한 주장을 한 자”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김기정은 당시 세력가이며 재산가일 뿐 아니라 변호사로 통영군은 대표하는 관선(官選) 경상남도 평의회 의원이었다. 1926년 말 경남도평의회에서 남해군 출신 도평의원 윤병호(尹炳浩)가 한 면에 보통학교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는 1면1교제(1面1校制)를 제안했다. 이때 김기정이 일어나 말하기를 “무슨 소리냐? 조선 사람에게는 교육이 필요치 않다. 조선사람은 보통학교만 나오면 사상이 악화 되어 사꾸라몽둥이를 끌고 다니며 불량한 짓을 하고 사회운동의 선봉이 된다. 지난 1919년의 소요 이래 당해 보지 않았느냐? 조선은 교육으로 망했다.”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떠서 “도평의회에 조선어 통역을 철폐하자. 황국어(皇國語)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도평의원 자격이 있는가?”라는 말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일본인 도평의원조차 보통학교의 증설을 주장했으며, 도지사조차도 통역이 필요하다고 환기시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통영의 열혈청년 김원석(金元錫, 당시 24세 정량동거주)이 분함을 참지 못해 이 내용을 담은 김기정 징토문을 수백 매 인쇄하여, 1927년 3월 15일 시내에 살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 저녁 대화정(大和町) 김기정의 집을 찾아가 김원석은 통영군민에게 솔직히 사죄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라고 김기정을 윽박질렀다. 그러자 김기정은 딱 잡아떼며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 마침 미리와 김기정과 무슨 얘기를 하고 있던 순사출신 허기엽(許基燁)이 김기정을 거들었다. 김원석은 홧김에 허기엽을 구타하고 귀가하자, 허기엽의 고소로 3월 17일 전격적으로 구속됐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소위 김기정 사건은 전 통영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날 밤, 태평동 불교포교당에 통영청년단을 중심으로 유지청년 30여명이 어둠을 타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김기정 징토문과 김원석의 구속에 따른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숙의 끝에 김기정(金淇正)에 대한 김원석의 광고진상 조사회를 구성하고, 4명의 조사위원을 선임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남도평의회 회의록을 열람하고, 각 군의 도 평의원들을 직접 만나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케 했다.

경남을 동․서부로 나누어 동부방면 조사위원으로 박봉삼(朴奉杉), 박중한(朴仲漢)을, 서부방면에는 박태근(朴泰根), 최천(崔天)을 파견하여 진상을 면밀히 조사케 하고, 그 조사결과를 그달 25일 시내 봉래좌(봉래극장)에서 시민들에게 직접 보고하기로 하고 산회했다.

3월 25일 오후 1시반, 봉래좌에서 김기정사건 진상보고회 가 임시의장 박봉삼의 사회로열렸다. 진상보고회를 갖게 된 경위를 박봉삼이 설명한 후 4명의 조사위원이 차례로 등단하여 조사한 내용을 상세히 보고했다. 아울러 경남도평의회에서 필사해 온 회의 속기록을 낭독하니 극장 안을 꽉 메운 6백여 시민들은 격분했다. 김원석이 뿌린 김기정 징토문의 내용이 모두 사실일 뿐만 아니라, 징토문에는 없던 귀를 막고 싶은 새로운 사실까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즉 김기정은 조선인 보통교육반대와 도평의회의 조선어통역 철폐만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마침 그때 학교설립신청서를 내놓고 있던 조선인 고등교육기관인 마산고등보통학교와 부산여자고등보통학교의 신설에는 반대하고, 일본인 교육기관인 마산중학교의 신설에는 찬성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김기정의 같잖은 언설에 일본인 도 평의원 마쓰오 시게노부(松尾重信) 마저 “지금 보통학교 현상을 보건데 학교 수가 적어 제 나이에 입학 못하고 대개 열두세 살에야 겨우 입학하여 스무 살 가까이 되어 졸업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히 시기를 놓쳐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자포자기할 염려가 많으니 이들을 구제하는 의미에서라도 하루빨리 일면일학교제를 실시하여야 합니다”하며 김기정을 반박했다. 또 김기정의 조선어통역 철폐 발언에 대해서는 도 평의회의장인 일본인 도지사 와다(和田)로부터 “일본말을 잘 모르는 의원들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통역을 두는 것입니다”라는 짜증 섞인 핀잔까지 맞았다는 사실이 속기록에서 밝혀졌던 것이다.

김기정의 반민족적 망언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객석에서는 “민족반역자 김기정을 때려죽이자!”라는 고함이 터져 나오고, 극장을 가득 메운 6백여 명의 시민들은 흥분하여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다. 공기가 이렇게 험악해지자 임시의장 박봉삼은 연단에 올라 두 손을 들어 흥분한 시민들을 제지하고 진정을 호소하여 서둘러 폐회를 선언한 것이 오후 3시 20분경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아무도 퇴장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박봉삼은 위원회에서 대책을 협의하고, 결론을 이끌어낼 때까지 조용히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하고 위원들과 대책회의를 속개했다. 한 시간 동안 숙의 끝에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결의 사항> 1. 모든 통영사람들은 김기정과 절교하자. 만일 그와 절교치 않는 사람은 제2의 김기정으로 인정하자. 2. 김기정의 죄상을 모든 조선사람들에게 알리자. 3. 김기정 성토연설회를 개최하자. 4. 김기정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케 하자. 5. 김기정을 도평의원으로 선출한 것을 우리지방 유권자의 망동 인즉 그 책임을 통감하고 이번 시민대회에서 전 조선민중에게 사죄하자.


박봉삼은 결의사항을 시민들에게 공포한 후 다음 시민대회개최에 따른 구체적인 협의에 들어갔다. 뒤이어 열린 김기정징토시민대회 집행위원회는 다음 3개 사항을 결의하고 5시 반에 폐회했다. <결의사항> -. 시민대회 결의문을 당일 인쇄하여 시내에 산포한다. -. 이달 27일 오후 2시에 시내 봉래좌에서 「김기정성토연설회」를 개최한다. -. 김기정에 대한 조사보고회와 시민대회 회의록을 수 만매 인쇄하여 전국에 산포한다.


그리고 문안작성위원으로 박중한, 박태근, 김상호 세 사람을 선임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벌렸던 3월 27일의 「김기정성토연설회」는 경찰의 집회금지로 불발되고 만다. 뜻을 이루지 못한 시민대회집행위원회는 매일 회합을 갖고 대회결행의 묘책을 짜느라고 부심하고 있을 때, 4월 1일자 동아일보는 1면 상단에「보통교육반대설에 대하여」라는 사설로 김기정의 망언을 통박한다.

“…일본내지연장주의 하에 일선융화의 시급을 절감하고, 이것을 주지하고 만반시설을 설치하며, 백방으로 수단을 다하는데, 모방면에서는 이를 공언하기를 꺼리며, 이를 선전하기를 기피하는 금일에 있어, 단군의 혈통을 받아 조선인의 음식을 먹으며, 조선인의 의복을 입은 자가 감히 천만대 에 걸쳐 개인의 생명을 단절하며, 사회를 폐멸할 망언을 토하여 ,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며,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는, 마땅히 그 공직을 빼앗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의당 전사회로부터 매장시켜버려야 한다.” 이로해서 김기정의 반민족적 언동은 전조선민에게 알려지고 김기정 규탄대회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4월 4일 마산청년회는 마산구락부회관에서 「김기정망언진상보고회」를 개최하여, 김의 죄상을 낱낱이 들추고 나서 사회적인 제제를 가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그 실행방안을 5인의 실행위원에게 위임하는가 하면, 함평청년회연합회에서는 김기정성토대회를 열고 다음 사항을 결의한다. -. 김기정징토문을 사회각단체에 보낼 것 -. 통영의 각사회단체에 격려전문을 보낼 것

이렇듯 경향각지에서 김기정을 성토하며 민족적 울분을 삭이고 있을 때 조선민중의 정서에는 아랑곳없이 김기정은 관선 도평의원으로 재임명된다. 시민들의 울분과 항일의지는 더욱 고조되고, 이런 분위기가 특히 경남일대에 팽배해지자, 관선경남도평의원 문상우(文尙宇), 김경익(金慶翊) 등 4~5명은 김기정과 함께 의원활동을 할 수 없다며 사의를 표명하기에 이른다. 문상우는 “작년 도평의회에서 김기정이가 조선인교육반대를 역설한 것이 사실인데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로서는 일반에 대한 면목이 없습니다. 이러한 한 문제인물과 함께하는 관선도평의원이 다시 된 것을 유감입니다. 나는 일반의 여론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곧 사직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김경익은 “일반 사회에서는 김기정과 동류가 아니면 도저히 관선도평의원이 될 수 없다고 오해하겠기에 사직하고자 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김기정과 같이 의원생활을 한다면 틀림없이 일반에게 제2의 김기정으로 인식될 것입니다.”라며 김기정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한편, 통영에서는 4월 8일 오후 2시에 봉래좌에서 시민대회를 개최키로 하고 벽보를 붙이며 홍보전단을 돌렸으나, 이 역시 경찰의 제지로 불발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마산에서는 4월 14일 마산청년회 주최로 이 사건의 자체진상조사보고회를 갖고 4월 20일에는 김의 성토대회를 개최한다.

4월 16일 오후 8시 통영정화회(統營正火會)는 최천(崔天)회장을 중심으로 불교포교당에 은밀히 모여 정기총회를 한다면서 거사를 의논했다. 그러던 중 경찰은 정화회가 비밀결사라고 강제해산시켰다. 또한 5월 5일 김기정의 관선도평의원 재임명에 대한 도 당국을 규탄하는 시민대회와 시위도 경찰의 강제해산과 강경진압으로 무위에 그치고 만다. 당시 경남도 당국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연설회, 대회나 집회도 금지로 일관했다. 분출구를 찾지 못한 시민들의 민족감정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즈음인 5월 9일 통영청년단원 11명이 전격적으로 구속된다. 김기정의 고소로 구속된 이들은 3월 25일 봉래좌에서 열렸던 김기정사건진상보고회와 시민대회의 집행위원들로 박봉삼, 박중한, 박태근, 박태규, 김상호, 강희영, 김주완, 최남기, 최천, 박영근, 배홍엽 등이었다.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그들은 김기정에 대한 성토의지와 그 당위성을 당당하게 주장했고, 그래서 그들의 조서는 그날 밤 안에 일사천리로 작성됐다. 그들은 「명예훼손죄」와 「협박죄」로 이튿날 「질풍신뢰(疾風迅雷)」같이 예심에 넘겨졌다. 구금 이튿날 바로 예심으로 넘겨지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서로 연통하여 11일부터 일제히 단식투쟁으로 그 부당성에 맞섰다. 이 사건을 중시한 신문기자들이 김기정을 만나 고소사실을 확인했더니 김은 “김원석, 박봉삼, 박중한, 박태근, 최천 다섯 사람은 허위사실을 날조 유포했으므로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으나, 나머지 일곱 명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딱 잡아떼었다. 한편, 그들이 구속 다음날로 예심에 넘겨진 사실을 안 황덕윤(黃德允), 황봉석(黃奉石), 김상훈(金相壎), 이태원(李泰源), 김동근(金同根), 염원모(廉元模) 등 34~35명이 5월 10일 저녁 불교포교당에 모였다. 이들은 먼저 일을 능률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민정회(民正會)」라는 민족단체를 결성했다.

그리고 나서 민정회원들은 김원석과 박봉삼등 12인을 구출하기 위한 변호사 선임비와 보석금을 마련하는 방안을 다각도로 논의했다. 그 결과 5월 12일 오후 1시에 봉래좌에서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12지사들의 석방촉구와 모금호소를 하기로 결의하고, 5월 11일 중으로 시민대회개최를 공고하는 전단 수천 매를 인쇄하여 시내전역에 배포하기로 했다. 5월 12일의 시민대회 역시 경찰의 사전봉쇄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나 그날 12시경부터 봉래좌 앞에는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통영경찰서장 다무라(田村藤市)는 전 경찰력을 동원하여 봉래좌 입구를 완전 차단하고 군중해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황덕윤을 위시한 시민대회준비위원들은 군중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쳐들며 “예심을 즉시 취소하라!”, “구금자들을 즉각 석방하라!”, “김기정은 고소를 취하하고 민족 앞에 사죄하라!”고 구호를 선창하면 시민들은 호응 복창하면서 시위를 감행하게 됐다.

예상 못한 사태의 전변에 당황한 다무라 서장은 재향군인과 일본인청년단을 긴급소집하고 소방호스까지 동원하여 시위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이날은 수차의 시민대회가 경찰의 제지로 인해 불발되어 분화구를 찾지 못한 시민 감정이 폭발직전에 있었고, 경찰병력도 범시민적인 궐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마음대로 강경진압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통영 전체가 이 사건으로 민정이 극도로 불안한 터에 자칫 시위군중의 민족감정이라도 촉발하는 날이면, 어떤 사태로 돌변할지 몰라 섣부른 주동자 연행이나 강경진압은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무라 서장은 영악한 위인이었다. 유화 제스처를 쓰면서 시민들의 민족감정을 무마하는 한편,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3시간여의 시위 끝에 일단 해산한 시위군중은 그날 저녁 어둠이 깔리자 하나 둘씩 다시 거리로 나왔다. 냇물이 모여 강물을 이루듯 시가의 중심지인 길야정(항남동) 5거리에는 삽시간에 1000여 명의 군중들로 넘실거렸다. 이럴 때 군중 속에서 우렁찬 웅변이 터져 나왔다.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의 마음과 뜻은 오직 하나인즉 이 길로 일대는 김기정의 집으로 가서 고소취하를 촉구합시다.!” 그 말이 떨어지자 “옳소! 갑시다!”하는 호응과 함께 도도한 시민대열은 간선도로를 따라 경찰서 방면으로 구비를 틀었다. 대열이 일단 방향을 잡자 시민들은 일제히 구호를 제창하면서 군중 속에다 자기를 묻으며 동족의식을 뜨겁게 확인하고 있었다.

저녁 9시경 지금의 중앙동 한일은행 앞에서 자연스레 두 줄기로 나뉜 시민대열은 경찰서와 김기정의 집으로 몰려갔다. 구속된 12지사들의 가족과 연고자를 앞세우고 경찰서로 몰려간 시민 5백여 명은 구속자들의 예심취소와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한참 만에 다무라 서장이 메가폰을 들고 경찰서 정문에 나와서 시위 군중을 향하여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의 요구사항은 잘 알아듣겠다. 그러나 예심취소나 구속자 석방은 본관의 권한 밖의 일이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아침에 대표자들과 다시 만나 이야기 하자.” 그러자 구속자 가족 하나가 나섰다. “우리도 당신의 말을 잘 알아듣겠다. 예심취소와 구속자 석방이 당신의 권한 밖의 일이어서 곤란하다면 당신의 권한 안에 있는 일이라면 들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냐? 되도록 들어주겠다.” “그러면 경찰서장의 권한에 속하는 구속자의 면회를 당장 시켜 달라. 그들은 지금 단식투쟁중이라는데 우리가족들의 눈으로 그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해야겠다.” 다무라 서장은 목소리를 낮추고 한껏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은 지금 자고 있다. 취침시간에 불러내는 것은 규정에 어긋날 뿐 아니라 당사자는 물론, 딴 수감자들에게도 좋지 않다. 더군다나 이런 시위 중에는 더욱 불가능하다. 그 대신 내일 아침에는 가족들과 면회를 시켜주겠다. 그러니 내말을 믿고 오늘은 해산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가 주기 바란다.”

한편 김기정의 집으로 몰려간 시민 5백여 명은 김기정에게 고소의 즉각 취소와 대국민 사죄 그리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김기정의 집에는 불이 꺼져 있고 굳게 잠긴 대문 앞에는 착검한 총을 든 순사들이 지키고 있어, 구호를 외치며 기세만 돋구었을 뿐 별다른 소득이 없이 11시경 해산하고 말았다. 폭풍전야와 같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 밤이 지나고 5월 13일의 날이 밝자 시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번졌다. 구속자 12명중 누군가가 단식투쟁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어젯밤 다무라 서장의 면회약속을 믿고 차입할 옷가지와 사식을 준비하고 있던 가족과 연고자들은 출근시간이 되기도 전에 경찰서로 몰려들었다.

평소 위장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상호 가족은 지레짐작으로 울며불며 야단이었다. 다무라 서장은 이른 아침부터 경찰병력 외에 소방대 재향군인회 일본인청년단 등 80여명을 소집하여, 일본도 목검 몽둥이 따위로 개인무장을 시킨 후 법원 경찰서 우체국을 위시한 시내 요소에 배치하고, 삼엄한 경계망을 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전 9시가 되자 통영경찰서 앞 간선 도로에는 1천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여 구속자 가족들의 면회 결과를 기다리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10시가 되자 시민들은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다행히 사망자 발생은 헛소문이었다는 것이 확인됐으나, 사흘간의 단식투쟁으로 초췌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나온 가족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고, 어느 할머니는 “죄 없는 내 자식 내 놓으라”고 울부짖으며 경찰서 앞마당에서 마구 뒹굴었다. 이에 자극된 시민들은 경찰서 앞 대로를 가득 메우고 “무고한 열두 사람을 즉시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고 경찰의 해산명령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또 김기정의 집으로 몰려간 시민 1천여 명은 ‘민족반역자 김기정은 고소를 취하하고 민족 앞에 사죄하라!’는 구호를 제창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렇게 시작된 이날의 시위는 경찰의 총검과 소방호스에 밀리며 오후 5시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했는데, 경찰서에서 김기정 집에 이르는 모든 길과 공지는 4~5000명의 시위 군중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한편 민정회 간부 황덕윤과 황봉석은 구속 중인 12명의 지사들이 그날 아침 가족 면회 시에 마산의 서기홍(徐基弘) 변호사를 불러달라고 했다기에 서변호사를 오게 해서, 그날 오후에 구속자들을 접견케했다. 그들은 서기홍 변호사를 12지사의 변호인으로 선임하는 한편, 이때를 여론조성을 위한 대세장악의 호기로 보고, 이날 오후 3시경 봉래좌 앞에 있던 태평여관에서 「근고(謹告)」라 제(題)한 격문을 초(草)하여 부도정(중앙동) 소재 삼성인쇄소에서 5백매를 급히 인쇄하여 오후 6시경 시내전역에 산포했다.

“…枚擧한 바 김기정의 죄악은 전조선에서 심사되어 이에 대한 징토의 聲이 높아가고 있는데도 김기정의 반성 없는 태도와 당국의 불법적인 處置를 보라! 정의의 철권으로 제재하려던 김원석군은 물론, 이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하여 청년 11명도 협박죄로 몰려 구속됐다. 그래서 同人等은 11일부터 食을 斷하고 其不當한 당국의 처치에 대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생명이 경각에 재하니 이에 보조를 共하는 五人等 역시 죽기로 싸우고자 한다. 五人等 동족의 생명까지 蹂躪될 처지에 있으니 坐視할 수 없다. 五人等도 사명을 다하여 필히 聲을 한가지로 하여 相應하자…”

하루 종일 시위를 하고 일단 집으로 돌아온 시민들이 한숨 돌리려 할 참에 격문이 날아들었다. 그 격문에 다시 자극된 시민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시민들의 얼굴에는 아까와는 다른 새로운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상찮다고 여긴 다무라 서장은 길목마다 무장경찰과 재향군인 일본인청년단원으로 조를 편성하여 지키게 하고, 경찰서 현관 위 노대에는 기관총까지 설치해 놓고 사태의 심각성을 경남도경에 긴급 보고했다. 오후 7시가 되자 시내전역은 「계엄상태」가 됐고 싸늘한 정적이 무겁게 감돌고 있었다. 8시가 됐을 무렵에는 거리에 쏟아져 나온 시민이 수천 명에 이르렀고, 한참 술렁이며 맴돌던 물결이 누군가의 선창에 호응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경찰서와 김기정의 집으로 쇄도해 갔다.

길목을 지키고 있던 경찰 경계조는 군중의 수와 기세에 압도되어 저지할 엄두도 못내고, 멀건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김기정의 집으로 몰려간 시민 1천여 명은 굳게 잠긴 대문 앞에 무장한 순사들이 지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집안으로 밀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구호와 함성만 지르며 기세를 돋우었으나, 장본인 김기정이 이미 피신하고 집에 없다는 말을 듣고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참에 김작불(金作不), 박갑이(朴甲伊), 김근조(金根祚) 등 몇 명이 김의 집 뒤안으로 들어가 김의 집으로 돌멩이를 마구 집어던졌다. 이들의 돌멩이질로 김의 집 본채 기왓장과 안뜰에 있던 장독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군중은 그 파열음에 자극되어, ‘민족반역자 김기정이를 때려죽이자!’고 외치면서 김의 집 대문으로 짓쳐 들어갔다.

잔뜩 긴장해 있던 순사들이 착검한 총으로 쇄도하는 군중을 가로막다 힘이 부치자 급한 김에 위협삼아 공포 몇 발을 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총소리에 놀라 뒤로 물러나서 일순 멈칫하던 시위군중이 한 박자가 지나고 나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문 쪽으로 돌멩이가 막 날아들었다. 순사 최학익(崔鶴翊)이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주저앉았다. 그러자 나머지 순사들도 돌멩이를 피하느라고 자세를 낮추고 있을 때 시위군중들은 기세를 얻어 ‘와아’ 함성을 지르며 대문을 박차고 집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김기정의 집안으로 쇄도한 시민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지며 김기정을 찾았다.

그러나 끝내 보이지 않자 마침 그 집을 지키고 있던 김기정의 사촌형 김기흔(金淇炘)을 마당으로 끌어내어 마구 짓밟았다. 그리고는 가정 집기를 닥치는 대로 박살내고 장독과 유리창을 모조리 깨부수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구들장까지 파 엎어 버렸다. 이날 밤 김기정의 집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인근도로는 노호하는 시민들로 해일이 일었다. 한편 밀물처럼 경찰서로 몰려간 시민 수천 명은 경찰서 앞 간선도로를 가득 메우고 함성을 돋우었다. “죄 없는 지사들을 즉시 석방하라” “예심을 즉각 취소하라”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다무라 서장은 강온양면전략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응원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시위가 더욱 거세지고 유치장의 수감자들까지 함성을 지르며 내외가 호응하자 다무라는 강수를 써보기로 작정했다. 다무라 서장은 짐짓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 나가 기관총좌 아래 위압적으로 떠억 버티고 섰다. 군중의 함성이 잠깐 가라앉자 그는 시위군중을 향하여 큰소리로 경고했다. “여러분들의 뜻은 충분히 알겠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금 대일본제국의 법치에 불법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당장 해산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면 여태까지 여러분의 언동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겠다. 그러니 다들 돌아가라. 본관의 이런 관용에도 불구하고 계속 소요를 일으킨다면 본관도 여러분들을 의법처단하지 않을 수 없다. 다들 돌아가라. 내가 셋을 셀 동안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가차 없이 연행해 가겠다. 자, 하나, 둘” 그러나 다무라 서장은 셋을 채 세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그냥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어디서 날아온 주먹만 한 돌멩이가 다무라의 입에 정통으로 맞아 앞니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기 때문이다. 이를 신호로 계속 돌멩이가 날아들어 경찰서 정문의 외등과 전면 유리창이 거의 다 깨어지고, 야트막한 담장 안에 일렬로 늘어서서 경계를 하고 있던 경찰들은 다무라 서장을 들쳐 업고, 허겁지겁 청사 안으로 피신하여 창가에 몸을 은신한 채 총구만 밖으로 내놓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휘관인 다무라 서장이 중상으로 꼼짝할 수 없으니, 지휘계통이 흐트러졌고 명령 없이 발포도 할 수 없으니, 날아드는 돌멩이 속에서 경찰은 기가 완전히 죽어있었다. 경찰서가 이 지경이니 시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치안부재상태의 시가는 시위군중들의 함성만 넘쳤고 놀란 일본인들은 문을 굳게 잠그고 숨었다.

또 이날 일본인 집단거주지를 습격하여 촌락을 불태운다는 소문이 돌자, 외곽에 있던 일인 집단촌인 오까야먀무라(岡山村, 도남2동)와 히로시마무라(廣島村, 미수2동)는 황급히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고 순찰을 돌며 밤새껏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일인집단촌을 습격하거나 일인 집을 덮치지는 않았다. 민정회를 주축으로 하는 청년들이 폭력은 자제하도록 극력이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전시민적 항일운동에 거의 속수무책이었던 경찰은 이날 자정 무렵에 인근 도시 경찰서에서 100여명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세를 만회하고 위협사격을 하면서 시위를 강경진압하고 시위 군중을 닥치는 대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다무라 서장의 지원요청을 받은 경남 경찰부는 후지하라(藤原)고등과장의 지휘아래, 부산, 마산, 진주, 사천, 고성 등지에서 경찰병력 1백여 명을 차출하여 10여대의 차에 나누어 태우고 긴급 출동했던 것이다. 시위 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숨어서 움츠리고 있던 경계조가 나타나고, 재향군인들과 일본청년단원들이 일본도와 목검을 휘두르며 소방차들이 물을 뿜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 군중들의 기세도 쉽게 꺾이지 않았다. 이튿날인 5월 14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피차 수십 명이 다치고 2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검거는 계속됐고 이날 저녁까지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35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에는 기미만세운동 때 통영에서 33명의 예기낭자군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했던 기생 이국희(李菊姬)를 비롯하여, 강명순(姜明順), 주선이(朱善伊) 등 기생과 유치원보모 최봉순(崔鳳順)도 끼어 있었다.

시위자 검거와 주모자 색출이 계속되고 있던 이날(5월 14일) 오후, 단기를 앞세운 통영청년단원들은 장송곡 같은 찬송가를 연주하는 브라스밴드의 뒤를 따라 시가를 천천히 행진하며 침묵시위를 감행했다. 이를 본 연도의 시민들은 혀를 깨물며 오열했고 경찰은 황급히 출동하여 단기를 압수하고 단원들을 연행했다. 한편 경찰은 이번 사건의 빌미가 된 12명의 지사들을 5월 14일 새벽에 은밀히 경찰경비정에 태워 마산검찰지청에 이송시켰다. 경찰은 서슬이 시퍼렇게 날뛰며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싶은 조선 사람은 무조건 끌고 가서 닥달부터 하고 보았다.

줌치나 허리띠에 장도칼을 차고 있던 사람들은 불문곡직하고 잡혀가서 테러분자로 몰려 어처구니없는 자백을 강요받아야 했다. 시민들은 어제까지의 기개는 날개 밑으로 감추고 울분을 짓씹으며 쭉지를 내려야 했다. 그 이튿날 5월 15일은 일요일이었다. 통영청년단에서는 미륵산 소풍을 간다며 지육부(智育部) 학생들과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대오를 지어 판데목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판데목에는 경찰대가 지키고 서서 그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즉시 해산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 도당을 지어 딴 곳으로 간다면 모두 연행하겠다.”

5월 15일 오후가 되자 ‘소요’는 일단 ‘진압’됐다고 보고, 인근 도시에서 지원 왔던 경찰병력은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이번 시위사건의 주모자와 시위에 앞장섰던 사람들에 대한 내사와 검거는 통영경찰서에 의해 계속되고 있었다. 즉 통영청년회원 10명을 검속하고 검사가 직접 통영으로 와서 취조했다. 이번 사건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편파적 보도로 시민을 선동했다하여 신문기자 몇 명을 연행했고, 서울과 마산 등지에서 특파됐던 신문기자들에게는 강제퇴거명령이 내려졌다. 또 이날자로 그렇게 뻔뻔스럽게 버티던 김기정도 별수 없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당국에서는 자발적으로 사직했다고 언명했다. 이후 사태가 점차 악화되자 김기정은 종적을 감추었는데 일본으로 피신한 듯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통영은 일견 평온을 되찾은 듯 했다. 얼핏 보기에는 민족의 혼불이 일제의 총칼과 소방호스에 의해 무참히 꺼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형세였을 뿐 애틋한 민족애는 안으로 더욱 뜨겁게 타고 있었다. 검거와 훈방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열흘간의 심사 끝에 350명의 검거자 중 21명은 혹독한 문초를 받고 있고 300여 명은 풀려나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경찰과 그 경찰에 아첨하는 무리들의 악랄한 음모가 있었다. 당시 통영에는 「삼구회(三九會)」라는 친일단체가 있었다. 그들은 허기엽, 김기흔, 박세도(朴世道)를 중심으로 하는 전직 경찰관들로 그들은 퇴직 후에도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경찰의 권세를 등에 업고 동족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던 무리였다.

이권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끼어들어 농간을 부렸고 만약 그들의 비위라도 거스르는 날이면, 그들의 뒤를 봐주던 고등계 황(黃)경부에게 까닭 없이 붙들려가서 시시콜콜 온갖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통영사람들은 「삼구회」라면 뱀 보듯 하던 터였다. 시위가 한창일 때에는 누구 손에 맞아죽을지 몰라 김기정과 함께 꼭꼭 숨어있던 그들이 시위가 일단 진압되자, 다시 기상이 펄펄해져서 사건의 주모자 색출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없는 죄를 만들어 씌우고 증거를 조작하여 마구 옭아 넣었다. 일례를 들면 삼구회 회장 허기엽이 몇 해전 「통영노동당」관여하면서 공금 1000원을 횡령한 사실이 있었다. 이를 안 통영의 사회단체에서 들고 일어나 장부를 조사하여 허(許)로 하여금 변상토록 한 일이 있었다. 허는 이 앙심으로 당시 자기를 성토했던 사람들을 이 사건의 행동대원이라고 일러바쳐 잡아들이게 해서 고문했던 것이다. 따로 혐의를 붙일 수 없자 정 모, 송 모라는 순사 둘을 증인으로 조작하고자 했으나, 순사 둘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욱이 39회원 26명은 위장된 전보로 기자를 불러 김기정 사건 기사에 대해 사과를 강요하면서 집단폭행했다. 당시 동석한 경관은 방관하면서 구경만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삼구회의 망동과 모략은 재판과정에서 주경문(朱敬文), 박종한(朴鍾漢)의 폭로로 백일하에 드러나 이 또한 시민의 징토대상이 됐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공식적으로 여론화되지는 못했으나 통영사람들은 이들을 더욱 사갈시했다. 한편 이렇듯 통영지방에서 전주민이 일치단결하여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경성에서 열린 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서 이를 응원할 것을 결의했다. 즉 경성에서 개최된 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 출석한 경남대의원 제씨가 다과회 종석에서 통영 김기정 사건으로 지금 희생되어 있는 동지들에게 우선 사식대금을 얼마라도 모으자는 결의가 있었다. 또한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각 군에서 모집을 담당함과 동시에 그 가족에게도 위문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리하여 마산 동쪽은 김해의 배종철(裵鍾哲), 마산 서쪽은 하동의 김기완(金琪完)을 선정하여 책임을 지웠다. 이를 이행하기 위하여 5월 24일에 김해의 배종철은 이에 대한 통지문을 발송하려했으나, 김해경찰서에서 압수하고 도에 조회한 후 여부를 통지하겠다는 것이, 5월 31일에 와서 발송은 전혀 금지를 시켜버렸다.

5월 26일 이번 시위사건의 주모자 21명을 추려 일건서류와 함께 검사국으로 넘겼다. 통영검사국에서는 21명에 대하여 즉시 구인장을 발부하여 정식으로 구속시켰고, 그 이튿날 부산지방법원에서 예심판사 오가와(小川)와 판사대리 마쓰시다(松下)가 통영에 출장 와서 예심을 보았다. 이들 21명은 「소요․출판법위반․기물손괴․상해」등의 혐의로 마산지법지청으로 다시 이송됐으니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황덕윤(당시 28세, 상업), 주경문(29, 이발업), 황봉석(29, 상업), 徐相懽(40, 농업), 박종한(41, 양조업), 申全熙(56, 의료업), 이태원(30, 상업), 김상훈(30, 양복점), 金永仲(40, 신문기자), 김동근(28, 어업), 염원모(28, 어업), 裵奉誌(33, 지물업), 金渭祚(36, 일용직), 김작불(25, 일용직), 朴甲伊(27, 정육점), 김근조(25, 농업), 文福萬(18, 직공), 梁在戌(19, 이발견습공), 최봉선(21, 유치원보모), 주선이(26, 기생), 강명순(24, 기생).

이 사건(1차 김기정징토사건 12명, 2차 시위사건 21명)은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라, 이들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마산지법의 1호법정은 쇄도하는 방청객들로 대혼잡을 이루었다. 즉 마산초유의 대공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수감자의 가족과 친지는 물론이고 경향각지에서 몰려온 민족단체와 신문기자들 그리고 마산시민들로 항상 수 백명이 북적대었기 때문이다. 방청권은 60매 밖에 발부하지 않았는데 그마저 대부분 엉뚱한 데로 흘러가 방청권을 얻지 못한 나머지 수백명은 법정밖에 서성대며 재판의 진행을 귀동냥으로 들어야 했다.

김원석, 박봉삼 등 12인의 1심공판은 1927년 9월 13일부터 10월 3일까지 4차례에 걸쳐 이시무라(石村)재판장의 심리와 서기홍, 박지영(朴志永) 양 번호사의 변론으로 진행됐다. 법정에서 이들의 태도는 실로 당당한 것이었다. 예심결정서에 기재된 내용을 떳떳하게 시인하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기에 결코 죄가 될 수 없다며, 어깨를 쫙 펴고 재판부에 맞섰다. 김원석은 “내가 김기정 징토문을 산포한 것을 그 개인이 미워서가 아니다. 통영군민의 대표인 도평의원이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망령된 짓을 하므로 꾸짖은 것이다. 이를 알고도 덮어두는 것이 죄가 될지언정 자기 직분에 충실하라고 한 것이 어째 죄가 되느냐”고 대들었다.

박봉삼은 “김기정이가 우리들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모양인데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천인이 공노할 그런 매족배 앞에 무슨 놈의 명예가 있단 말인가. 훼손할만한 명예라는 것이 애당초 없는 터에 어떻게 명예훼손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가”하고 따졌다. 그러자 재판장이 박봉삼에게 물었다. “만약 피고가 김기정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나는 박봉삼이야, 당신은 어찌하여 그 김가 놈을 나와 같은 반열에 놓고 감히 비유하는가”하며 대갈일성하니 이시무라 재판장은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하더니 휴정을 선언해 버렸다. 속개된 재판정에서도 의연한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박중한은 “우리는 시민들의 토의 결정한 사항을 시민들의 위임을 받아 진실을 규명했을 뿐 누구의 명예를 훼손한 사실도 없고, 누구를 협박한 사실도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면 다 명예훼손이 되느냐. 우리의 진상조사보고에 허위나 날조가 있으면 대보라”며 도도한 논설을 펴 재판장의 입을 다물게 했다.

박태근은 수단과 방법이 나빴다는 재판장의 말에 “조선 사람은 자유와 권리가 없는 민족이니 어떤 모욕이나 불이익을 당해도 가만히 있어야 된다는 말이냐”며 대들기도 했다. 또 이들의 변호인 서기홍, 박지영은 논리정연하게 이들의 무죄를 역설했지만, 변호인의 증인신청마저 검사의 요청이라며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극히 편파적이고 형식적인 법정에서 재판은 예정된 각본대로만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9월 20일 위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김상호만 병보석됐을 뿐이었다. 이들은 10월 3일의 4차공판에서 12명,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들은 즉시 불복 공소했다. 김원석, 박봉삼, 최천, 박중한, 박태근 5명은 각각 징역 1년 2월을, 김주완, 강희영, 박영근, 최남기, 박태규, 김상호, 배홍엽은 각각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병보석된 김상호를 제외한 11명은 10월 15일과 16일 양일간에 걸쳐 대구복심법원으로 이송됐다.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여 대구형무소에 이감된 12지사들은 해를 넘긴 1928년 4월 10일에야 재판정에 섰다. 이날 역시 가족친지들과 전국에서 모여든 민족단체 대표들로 방청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이 재판에 조선변호사협회에서는 이인(李仁), 조주영(趙柱泳), 유성희(柳聖熙) 3사람의 민족변호사를 대구에 특파하여 서기홍, 박지영변호사와 함께 이들을 변호하게 했다.

이날에는 하세부(長谷部)재판장의 사실심리와 타마나(玉名)검사의 구형이 있었다. 검사는 1심대로 구형했다. 4월 14일에는 다섯 변호사의 변론이 있었고, 5월 1일의 선고공판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다음과 같다. 김원석(당시 25, 잡화상), 징역 8월에 벌금 30엔, 박봉삼(53, 기독교전도인), 박태근(26, 칠기상), 박중한(30, 기독교회서기), 최천(29, 나전공상) 이상 4명 각각 징역 6월, 박영근(33, 양복상), 강희영(34, 해산물상), 최남기(38, 지물상), 김주원(31, 중외일보 기자), 김상호(28, 무직) 이상 7명 각각 징역 4월을 언도받고 김원석은 실형을 나머지 11명은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날 저녁 석방된 11지사는 대구에서 마산으로 와서 배편으로 이튿날(5월 2일)통영에 닿았는데, 이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선창을 메웠고 만세 소리와 함성이 강구 안에 질펀하게 깔렸다. 배에서 내리는 이들을 맞은 통영청년단 브라스밴드가 행진곡을 연주하며 앞서 나가고, 수많은 삶들이 이들을 옹위하고 , 행진곡을 합창하며 시가행진을 하니, 연도의 시민들은 함성과 박수로 의로운 이들의 귀환을 뜨겁게 환영했다. 한편, 황덕윤등 21인은 1927년 5월말, 마산지법 예심계로 넘어가, 장장 5개월 동안 사사끼(左左木)예심판사의「심리」를 받았는데 조서가 2천여 장이나 됐다. 5개월의 예심 끝에 1927년 10월 20일 예심을 종결한 사사끼 예심판사는 이들 21인을 「소요․출판법위반․기물손괴․상해」등의 죄명으로 기소했다.

기소 한 달 후인 11월 21일 이들의 제1회 공판이 마산지법 1호 법정에서 열렸는데, 전국에서 모여든 방청객 600여 명이 아침부터 법정 주위를 가득 메웠다. 이에 재판부는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마차 1대로 느릿느릿 이들을 실어 나르며,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시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날은 40명에게만 방청이 허용됐고 서기홍, 장자빈(蔣子斌), 조주영 3변호사와 이와시로(岩城)검사 입회하에, 이시무라(石村)재판장의 사실심리가 있었다. 이튿날 22일 오후 6시 40분까지 사실심리에서 황덕윤, 주경문과 박종한은 삼구회들의 사실날조와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즉 사건발생 당시 집에도 않았다는 서상환 진술, 39회의 위증, 황경부 고문을 폭로한 박종한 진술, 39회원이 사실을 훼손 날조, 저희들끼리도 충돌했다는 이태원진술, 순사증언도 불원, 심문자의 횡포를 폭로한 김동근의 진술, 밤눈어둡나,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이갑이의 진술, 순사 욕한 것이 원인이 되어 잡혔다는 양재술 진술이 잇따랐다. 황덕윤의 진술도 마찬가지였다.

이 재판에서도 변호인 측의 증인신청은 모두 기각됐고, 11월 28일의 선고공판에서 21인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들에 대한 변론은 12월 3일에 있었으며, 각계변호사의 통렬한 변론이 있었다. 이 중 4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은 문복만, 그리하여 최고 2개년 최저 4월이 구형됐다. 양재술, 주선이, 강명순 4사람은 예심기간 산입으로 이미 형이 만료됐기에 풀려나고, 나머지 17인은 즉각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했다.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이들 17인은 1년 이상의 법정 투쟁 끝에, 1928년 12월 13일의 선고 공판에서 다음과 같이 형을 선고받았다. 황덕윤, 황봉석은 각각 징역 1년 6월, 김동근은 징역 1년, 주경문, 이태원, 김상훈은 각각 징역 10월, 김영중은 징역 8월, 서상환, 박종한, 염원모, 김위조, 최봉선은 각각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이들 중 서상환, 박종한, 최봉선, 신전희, 배봉지, 박갑이, 김작불, 김근조 여덟 사람은 2년간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들 통영의 지사들이 출옥하자 일찍이 이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통영에서는 임철규, 김載학, 김기영 외 5인으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들을 맞았다. 먼저 출옥한 지사들은 상호 호별방문을 하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이들 역시 먼저 풀려난 11지사들을 위시한 통영사람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모두 2차례에 걸쳐 구속된 33인을 중심으로 주도세력들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연령으로 보면 18세부터 56세까지 걸쳐 있고, 20대가 15명, 30대가 10명, 40대 3명, 50대가 2명이었다. 결국 20〜30대가 25명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점은 이 운동이 청년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운동가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운동이 두 달 동안 지속되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통영지역민의 일치단결된 항일의식과 민족반역자에 대한 분노였다. 이 운동은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지역단위의 사회운동이자 일종의 항일운동 이었다. 이렇게 전개된 통영지역의 ‘김기정 징토운동’은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해외로까지 알려져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 가운데 내선일체에 대한 허구를 공격하고, 부일협력자에 대한 경종을 울려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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