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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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군인으로 최종계급은 대장, 최종보직은 합동참모의장이다. 2017년 8월부터 2022년 초까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냈다.
학군사관후보생(ROTC 2기) 최초로 대한민국 국군 서열 1위인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합참의장 재직시인 1998년 남해안 침투 반잠수정 격침 사건 당 시 국내 고정 간첩단을 일망타진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고,1999년에는 제1연평해전 승리에 공헌했다.
월남전에도 참전한 국가 유공자 이기도 하다.
군 시절 보국훈장 천수장·국선장, 보국포장 통일장을 받았고,한미 동맹의 상징인 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군 장성으로는 드물게 세 차례나 받았다.
퇴역 후인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맡아 개성공단 사업을 주도하며 남측을 향한 북한군의 배치를 후퇴시키는 군사적 이익을 창출했다.
2.생애
2-1 생애 초기
1941년 11월13일 서울특별시 전농동에서 김삼봉과 심학실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울 전농동에서 살아온, 평범한 집안이었고, 비교적 유복한 가문이었으나, 1950년에 6.25를 맞이하여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 당시 작은 형님이 국군을 죽이는 인민군이 싫다며 따발총의 실탄을 빼서 땅에 파묻어버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54년에 전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시절에 공부를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했다. 한때는 가출을 한 적도 있었고, 고교 시절에는 우열반을 나눠서 편성했는데, 열반에 배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암기과목 위주로 노력했다. 잠을 쫓는 약인 ‘카페나’라는 각성제까지 먹어가며 새벽 2시, 3시까지 공부하였다. 그 덕분에 1960년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진학했다. 사학과에 진학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역사교사였던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렇게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후 럭비선수로도 활약했다.
2-2 소위에서 대령 까지
그 후 리더십과 순발력을 배우기 위해 ROTC에 지원하여 1964년에 2기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강원도 양구군의 제2보병사단 31보병연대의 어느 소대였다. 소대장의 임무를 다 하면서도 군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다. 징계를 면하기 위해 권투 선수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의무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할 무렵에 당시 지휘관에게 "네가 제대하면 선수로 출전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전역명령을 취소시키며 그냥 군에 눌러 앉아 버렸다. 처음에는 대령까지 진급하는 게 목표였다.
그 뒤 1968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군사장교로 참전하였다. 베트남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부친이 별세했지만, 모든 가족이 ‘흔들림 없이 군대에서 성실히 복무하라’는 의미에서 이를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드리려고 서울로 보냈던 라이터를 보며 통곡했다.
8사단 10연대 인사주임(대위) 시절 스케이트 실력이 탁월했던 그와 당시 인접 21 연대장이었던 노태우 대통령과의 스케이트 시합 일화는 김진호가 쓴 자서전에 잘 나와있다. 8사단 빙상대회에 그의 탁월한 실력으로 500m,1000m에서 1등을 하며 10연대를 우승으로 이끌어 당시 우승을 원했던 21연대 노태우 연대장이 "21연대가 김진호 대위 한명을 못 이기는구나" 했다는 일화가 있다.(김진호 자서전 참고) 이 시절 전방 부대에서의 빙상 시합은 전투력 측정의 RCT 평가 이상으로 중시 여기던 경기였다.
배재중학교 시절부터 빙상 선수로도 활약하고,소위 임관후에도 부대 빙상 감독을 역임했던 김진호에게는 스케이트는 그리 어려운 운동이 아니었다고 한다.
소령 시절에는 장세동과의 인연으로 같이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했고, 이후 제5보병사단 제35보병연대 대대장과 수경사 제30경비단 부단장을 거쳐, 자신의 목표였던 대령까지 진급했다. 30단 부단장 시절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당시 새벽에 궁정동 안가를 수색하던중 당시 김재규 부하들에세 총상을 입고 신음하던 당시 박상범 경호관을 김진호가 발견하여 그의 지프차로 급히 병원으로 후송하였다. 그후 박상범 경호관은 훗날 경호실장에 취임하였다. 박상범 경호실장과 김진호는 고려대 60학번 동기로 알려져,훗날 박상범이 언론 인터뷰에 본인이 수십년간 대통령을 경호하면서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 가운데 김진호 덕에 살았다고 밝힌바 있다.
1981년 대령에 진급하고도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다. 당시 특전사 제3공수특전여단 부여단장이었다. 이것이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견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벽 일찍부터 장세동 대통령경호실장에게 직접 전화로 따졌다. 하나회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1983년 전방 지오피(GOP) 담당인 백골부대 제3보병사단 22연대장으로 발령을 받고 지오피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는 내무반 사고를 없애기 위해 전방 근무자를 세심하게 가려서 뽑는 한편 병영부조리 척결 및 선진병영문화에 온 힘을 쏟았다.연대장을 마친후 국방부 인사과장으로 근무중 1986년 드디어 장군으로 진급했다.
2-3 장군 시절
1986년 준장으로 진급후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의 인연등으로 하나회의 견제를 받아 51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당시 대령 보직이었던 3사관학교 참모장직을 수행하며,능력에 비해 보직은 편견을 받고 있었다.그러나 1987년 노태우 대통령 취임후에 김진호의 위관 시절부터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노대통령의 천거로 1989년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제37보병사단장의 자리에 부임하였다.당시 김진호의 진급 경쟁 상대였던 학군 2기 동기생은 당시에는 소장으로 1차 진급이 당연시 되던 준장에서는 최고의 보직인 특전사의 여단장이었는데,그 이유 때문에 대부분 여단장인 그의 동기생이 진급할 것으로 예상 했으나,능력으로 평가하라는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한직에 있던 김진호가 먼저 소장으로 진급하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영예롭게 37사단장을 마치고 교육사 참모장으로 재직후에 1991년에는 당시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의 발탁으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으로 영전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1993년에는 4월 중장 1차 진급이 예상 되었으나,1979년 12.12 당시 30단 부단장의 경력때문에 그해 10월에야 마지막으로 중장 진급,11군단장으로 취임하였다.
1996년에는 대망의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제2야전군사령관[8]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98년 3월에는 제28대 합동참모본부 의장 겸 통합방위본부 본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학군 출신으로는 전례 없는 승진이었다. 학군 1기인 박세환이 4성 장군으로 제2야전군사령관까지 올랐지만, 합참의장은 김진호가 처음이었다.
합참의장으로 재임하면서 동해안 잠수정 침투, 여수 반잠수정 격침, 제1차 연평해전 등 다수의 북한 군사도발에 맞섰다. 그때 유난히도 북한 측의 공세가 더 거셌던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 정책을 시험하고,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북한이 화전양면전술을 썼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에 우리 상하급부대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1999년 제1연평해전을 압승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김진호는 북한 경비정의 NLL 도발 시 교전규칙에 따라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
1999년 10월 명예로운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2-4 전역후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지냈다.
2003년 4월 30일 개성공단 착공식을 한 뒤 북측에서 당초 80억원에 약속한 50년치 임차료를 갑자기 1200억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근거도 없는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 분양가가 3.3㎡당 10만원에서 40만원으로 급증, 조성 계획에 큰 차질이 발생할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통일부는 북한과의 다른 사업까지 막혔다며 모든 책임을 미뤘고, 김진호는 계약내용을 바꿀 수 없다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1200억원이 무슨 큰돈이냐. 군 출신의 고집”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김진호 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 김진호는 리언 J 러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을 만나 개성공단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훌륭한 사업”이란 평가를 받아 미국 측 협조를 이끌어낸 뒤 북한과 협상하여 보상비 120억원에 출입국관리사무소 건축비 40억원 등 160억 원으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2017년 8월 재향군인회장에 선출되어 2022년 초까지 재임후 퇴임하였다. 재향군인회장 재직시 한미 양국 혈맹의 상징인 ‘미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을 건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아래는 국방일보에 실렸던 추모의 벽 건립 관련한 이원준 기자의 기사 내용이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내셔널몰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기념공원’ ‘베트남전 참전기념비’ 등 다양한 추모시설이 있다.
그러나 전사자 이름이 명기된 다른 추모시설과 달리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는 전사자 이름을 새긴 시설이 없어 별도의 추모비 건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미국의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KWVMF)과 교민들은 2010년 추모의벽재단을 설립하고, 2016년 추모의벽설치법안을 공동 발의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자금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당시 재단이 추산한 건립 예산은 2500만 달러, 한화로 약 290억 원이었다.
미 연방 기념사업법에 따르면 추모의벽설치법안 공포 후 7년 이내에 재단이 건축허가를 취득하지 못하면 법안은 자동 폐기된다. 문제는 건축허가 취득을 위해서는 총 사업비 중 80%를 확보해야 하는데, 누적 모금액수가 50만 달러에 불과해 사업이 좌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투수가 된 것이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였다. 2018년 8월 미국 향군 100차 총회 참석차 방미한 김진호 전 향군회장이 지난 4월 작고한 고(故) 윌리엄 웨버(전 KWVMF 이사장) 대령으로부터 상황 설명을 듣고 도움 요청을 받은 뒤 모금운동 추진을 결심한 것이다.
귀국길에 참석한 LA 동포간담회에서 김 전 회장이 이 결심을 밝히자 즉석에서 5000달러 모금이 이뤄졌고, 이것이 최초의 성금이 됐다. 이어 향군은 2018년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국방일보와 함께 적극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한 끝에 400여 개 국내외 단체, 22개 기업, 2만8577명의 향군회원 및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2019년 7월 모금한 7억 원을 추모의벽재단 측에 전달했다.
향군의 기여는 모금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전국적인 홍보활동을 통해 범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가보훈처에 지속적으로 지원을 요청한 끝에 마침내 200억 원이 넘는 정부의 예산 지원을 끌어냄으로써 추모의 벽 완공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게 됐다."
이렇게 추모의 벽 사업에 큰 업적을 남긴후 2022년 4월에 향군회장에서 퇴임후 그해 9월 30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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