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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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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문 (杜起文, 생몰년도미상)은 조선 후기 전라북도 김제시 지역(금구면) 출신의 무신이며,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우고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1]

개설[편집]

금산의 웅치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관군과 의병이 호남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전개한 싸움이다. 왜군이 충청도 영동의 황간 순양을 거쳐 1592년 6월 22일(음) 제원 천내강의 저곡나루로 금산성을 공격하여 오자 금산군수 권종이 저곡산성을 의지하여 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전사하였다. 이어서 6월 23일 금산성이 함락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6월 말 용담과 진안을 거쳐 전주로 공격해 가는 과정에서 7월 8일 진안에서 전주로 가는 길목인 웅치[곰티재] 일대에서 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이 호남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웅치전투에서 호남 수비군의 사투로 왜군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호남 방어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전투의 현장은 웅치를 경계로 한 지금의 진안군과 완주군 일대에 걸쳐 있었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전주 안덕원 부근까지 침입해 들어가 웅치에서 싸우다 퇴각한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의 군사와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웅치를 넘는 과정에서 호남 수비군의 사투에 의하여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으며, 전주부성에서는 전라감사 이광과 이정란이 수비 태세를 강화하고 있어서 전주부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10일 전라감사 이광의 명령에 따라 남원에서 이동해 온 동복현감 황진이 안덕원 너머 소양평에서 이들을 물리침으로써 전주가 지켜지고 전라도가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웅치전투 이후 호남 여러 군현에서 동원된 관군과 의병이 금산성으로 퇴각한 왜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금산 주위에 주둔하며 공방전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산의 왜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광주목사 권율이 지키고 있던 이치를 향하여 공격하여 왔다. 이치전투가 벌어졌던 시기는 정확히 전하지 않으나 7월 20일 이후로 추정되는데,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鎖尾錄)』에는 8월 17일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싸움에서 황진의 분전과 권율의 독전으로 왜군을 물리치고 호남을 지키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가계[편집]

본관은 두릉(杜陵).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두경승(杜景升)의 후손으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역임한 두양필(杜良弼)의 조카이다.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운 두경문(杜慶文)이 형이다.

두기문장군 가문의 연원은 두릉두씨(杜陵杜氏)의 족보와 중앙일보사(中央日報社)에서 발행한 『성씨의 고향(姓氏의 故鄕)』과 『한국인의 족보(韓國人의 族譜)』등의 문헌에 따르면, 시조(始祖) 두경녕은 중국 송(宋)나라의 두릉인(杜陵人)인데 송의 태종(太宗) 때에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자리에 있었는데, 당시 그는 진종(眞倧)의 옹립은 반대하다가 실패하여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죄천되자, 이에 아들인 중서사인(中書舍人) 두지건(杜之建)과 우습유(右拾遺) 두지봉(杜之逢) 형제를 데리고 정처없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1004년(목종 7)우리나라의 궁지현(宮池縣: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읍,만경현(萬頃縣)에 있는 궁지도(宮池島)라는 지금의 고군산도(古群山島)에 표착하게 고려에 귀화하였다. 당시 고려의 조정에서는 이 사실의 알고 목종(穆宗)이 두경녕에게 좌사관(左史官)이란 벼슬을 내리고 궁지현(宮池縣)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두릉군(杜陵君)에 봉했다.

5세조인 두방(杜邦) 공은 문하시랑(門下侍郞)벼슬 하였고, 평장사(平章事) 및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신 6세조인 두경승(杜景升) 공은 서경(西京,평양)을 평정하여 벽상공신(壁上功臣)에 봉하여졌다


활동사항[편집]

두기문(杜起文)은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兵使)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으며, 웅치전투와 이치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국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상훈과 추모[편집]

위성원종공신(衛聖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언론매체기고[편집]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공신 두기문장군 사적비 건립  (전북연합신문,정복규 기자,2022.01.20.)[편집]

선무원종공신과 진무원종공신이며, 병마절도사를 지낸 두기문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사적비가 김제시 만경읍 소재 두릉(杜陵)에 건립되었다. 두기문장군의 사적비는 두릉두씨 후손들의 뜻을 모아 세워졌으며, 기단이 0,6m, 비석 2.4m 총 높이 3m로 올해 8월에 비문제작을 시작해 12월에 완료했다. 사적비는 나종우 원광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가 비문을 짓고, 서홍식 한국서도협회공동회장이 글씨를 썼다.

  두기문장군은 조선 선조조에 지금의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 사복(司僕) 벽동군수(碧潼郡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수 권율(權慄)을 따라 대의(大義)을 주창(主唱)하였으며, 웅치전투와 이치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큰 공을 세웠다. 다음 해 행주산성에서 크게 이겼으며, 기공비(記功碑)가 세워졌으며, 선무원종이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수 심기원(沈器遠)을 따라서 종속인 두양필(杜良弼)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일등공신에 녹훈하고 병마절도사로 승진되었다.  

비문을 지은 나종우 원광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는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을 극복하는데 장군의 진충보국의 공적을 높이 찬양하며 위국충절의 정신을 이어받고 후세에 길이 전해지기를 바란다“라고 소감을 피력하였다.

두상달 국가조찬기도회장 및 두진천 전 군산중앙초등학교장은 “장군의 탄생지인 김제시 만경읍 두릉(杜陵)에 종친들의 뜻을모아 오랜 숙원(宿願)사업인 사적비를 세우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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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편집]

『전북의병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려사』 100권 열전13 두경승편
  • 『고려사절요』
  • 『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 『만경읍지』( 조선시대 정조연간)
  • 『김제군지』(김제군지편찬위원회, 1994)
  • 『김제시사』(김제시사편찬위원회, 2000)
  •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 1990)
  • 『청백교직자 청담 두진열선생』(청담두진열선생추모문집발간위원회,2019)
  • 두릉두씨 [杜陵杜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두릉두씨 세보 [杜陵杜氏世譜]』 1898.
  • 『두릉두씨 세보 [杜陵杜氏世譜]』 1925.


출처[편집]

디지털김제문화대전-두양필

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

[네이버 지식백과] 두양필 [杜良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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