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정의 처 열녀 진주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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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정 [杜時禎]처 열녀(烈女) 진주강씨(晉州姜氏)[편집]
두시정[杜時禎]처 진주강씨(晉州姜氏)는 (출생년도미상]]~ 1713년 12월 13일 ]], 전라도 옥구현)은 조선 후기의 열녀(烈女)이다. 본관은 진주이고, 군산시( 옛 옥구현) 회현면에서 출생하였다. 조정에서 1717년(숙종) 복호를 하사받았다.[1]
가계[편집]
진주강씨이며, 전라 어사를 지낸 어사공(御使公) 강원전(姜元鐫)의 후손이다. 강원전(姜元鐫)이 15세기에 옥구현[현재의 군산시 회현면 구정리]에 입거한 이후 그의 후손들이 옥구현에 세거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진주강씨 호부사공파라고 부른다. 진주강씨 호부사공파는 고씨·두씨·문씨·전씨 등과 함께 조선 시대 옥구현의 5대 대성(大姓) 중에 하나로 꼽힐 정도로 번창하였다. 강원전(姜元鐫)은 은열공 강민첨의 6세손이며 전라 어사를 지낸 어사공(御使公) 강원전(姜元鐫)은 조선 태조 조에 위사 공신에 책봉되었다. 강원전이 아홉 정승이 나온다는 길지인 옥구현[현재의 군산시 회현면 구정리(九政里)]에 입거한 시기는 태조 조에 강원전을 위사 공신에 책봉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5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강원전이 옥구현[현재의 군산시 회현면 대정리]에 입거한 이후 후손들이 회현면 대정리, 금광리, 세장리, 학당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입향조 강원전이 증직으로 호부 참판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을 호부사공파, 또는 어사를 지냈기 때문에 어사공파라고 부르고 있다.[2]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생애 및 활동상황[편집]
두시정 [杜時禎]의 처(配) 晉州姜氏는 어른과 수하를 잘 보살피고 음식 맛있게 만들어 접대하고 1713년 12월 13일 약을 마시고 남편을 따라 사망한 열녀(烈女) 시정공 처로 천성이 순후하여 두씨 가문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여 받들며 도리에 벗어나거나 지나침이 조금도 없었고 부군이 사망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하다가 약을 마시고 부군을 따라서 순사하여 숙종은 1717년 복호를 하사받았다.
믿을 진저! 우리 유학자 집안에 이 덕성스러운 빼어남이여! 이 일은 빼어나게 천리에 따른 올바름에서 나왔으며 천성을 지닌 사람에게서 나왔다. 대개 집안 행실은 효와 열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죽음으로 삶을 얻게 되었고 욕됨을 없애니 이 자진하신 일이야말로 어찌 아름답고 착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두릉두씨 가문에서 이처럼 훌륭한 일은 보지 못했다. 열부 진주강씨는 진주 보문각 대제학 통계군 준충 후손 전생서 주부 열의 손자 종지 딸로 중서령 경승공의 후손이고 정려 세운 효자 세준공 6세손 시정의 배위이다. 아아! 어렸을 적부터 천성이 정숙하고 부모님을 섬김에 그 뜻을 다하였으므로 여러 사람이 그녀의 순효를 칭찬했다[3]
시집 와서 시부모 섬김에 힘 다하고 매일 혼정신성(잠자리 보아 드리고 아침에 문안)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비록 집안에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도 맛있는 음식 올리기를 끊이지 않았고 본인이 음식을 받들어 올리고 비복(종)을 안 시키고 매번 음식 그릇을 가지고 드나들 때 얼굴은 온순히하고 목소리 부드럽고 빠른 말소리나 급히 서두르는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부모상을 당하여 곡을 하는데도 깊이 애통하고 얼굴빛이 무척 슬퍼하니 대강 말로 표현하기가 부족하더라. 장사지내고 제사범절에도 정성 다하고 예의를 극진히 하여 스스로 사례(관혼상제)에 합당함이 있고 남편을 공경하고 받들음에 혹시라도 도리에 벗어나거나 지나침이 없었다. 계사년에 남편이 심한 질병 앓자 매일 밤마다 천지신명께 쾌유하게 하여주시라고 기도드리며 남편의 죽음 대신하게 해주기 바랐으나 급기야 남편의 죽음을 맞이하는 아픔을 당하자 남편을 부여잡고 외치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남편 따라 죽기 작정하니 아들 기무, 석무, 윤무 세 아들이 모두 지극한 효자로 그녀가 기혈이 말라 죽음에 이르자 아픔을 참고 피를 내어 억지로 마시게 했다.[4]
아들 며느리가 걱정 되어 밤낮으로 곁에 모시고 시중들어 거의 죽음에 이르는 지경이 되자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네 아버지 곁에 함께 묻히고자 한다. 아버지 장례는 이미 마쳤으니 나는 수명 다하기 기다리겠다. 내 걱정 하지 마라. 너희는 장례일로 피곤할 테니 각기 물러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같은 가르침 내렸기 때문에 여러 아들과 며느리들은 근심을 풀고 여막으로 돌아갔는데 그날 밤 극약을 마셨다. 계집종 석덕이가 당황하여 뛰어 여막으로 가서 아들에게 고하여 아들이 달려 집에 와서 보니 모친이 입을 꼭 다물고 말을 못하여 침상에 엎드려 무릎 꿇고 구하려고 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침실에 약이 있어 보니 약 찌꺼기가 남아 있어서 비로소 음독하고 자결한 것을 알게 되었다.[5]
이는 어찌 오로지 미망인으로서 남편 따라 죽는 예의 따라 실행한 것이요 의리를 취한 열녀의 행실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아! 이 세 형제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섬기기를 극진히 하고 음식을 올릴 때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고 집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때는 부모님을 몸소 뵙고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고 밤에는 잠자리가 따뜻하고 깨끗한지 살피기를 힘쓰지 않음이 없고 부친께서 편찮으시면 매일 변을 맛보고 증험해 보았다. 돌아가시려고 하니 손가락 잘라 피를 내어 입에 떨어트리기를 3일 동안 계속했으나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시종일관 예절을 정중하게 하였고 장례 끝난 후 초막을 지어 3년 동안 여막 살이 하면서 한 번도 집에 가서 자는 날이 없었다. 훗날 모친상을 당해서도 장례 초종 예절을 부친이 돌아가신 때와 같이 하니 입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효자라고 칭했다. 임금은 정문을 내려 어머니와 세 아들, 네 분에 대하여 포상과 아울러 사급과 은전도 내렸다. 이는 읍지(邑誌)에 기록되어 있다. 아아! 한 집안에 일렬삼효가 나오기는 고금에 드믈 일이다! 먼저 두세준 효정이 있고 이 집안사람들의 효가 뒤따랐으니 신령스런 영지에 뿌리가 있고 감로수 예천에 근원이 있는 것과 같도다!
<규장각 제학(提學) 김회수(金晦秀) 근서(謹書)>
묘소 및 배향[편집]
공의 묘소는 옥구읍 둔산 선산에 있다. 두시정의 처 진주강씨(晉州姜氏)는 열녀(烈女)로서 1717년(숙종) 복호를 하사받았다. 두시정의 처 진주강씨(晉州姜氏)는 열녀(烈女)로서 회현면 금광리 원당마을에 후손들에 의해 열녀(烈女)비와 비각이 세워져 있다.
참고 문헌[편집]
⦁『고려사』 100권 열전13 두경승편
⦁『고려사절요』
⦁『이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 『옥구군지(沃溝郡誌)』옥구향교, 1924
⦁ 『옥구군지(沃溝郡誌)』 옥구향교, 1963
⦁『沃溝郡誌』옥구군지 편찬위원회, 옥구군 1990.11
⦁『沃溝人物誌』옥구문화원 1991
⦁『杜陵杜氏 世譜』1898년(戊戌)
⦁ 『두릉두씨 세보 [杜陵杜氏世譜]』 1925.
⦁ 『杜陵杜氏 世譜』 두릉두씨대종중, 1961년(辛丑)
⦁ 『杜陵杜氏 世譜』1986년(丙寅)
⦁ 두릉두씨 [杜陵杜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청백교직자 청담 두진열선생』(청담두진열선생추모문집발간위원회,2019)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분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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