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환 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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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복역.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
항일투사 윤병환(尹炳環; 1889년 3월 3일 - 1948년 6월 11일)은 칠원윤씨 37세이며 충효공의 후손이다. 부친인 문학과 예안김씨 사이에서 청양군 청남면 지곡리 222번지에서 태어났다.
항일투사 윤병환 기적비 해문
소재 청양군 청남면 지곡리 로변
건립 1993년 11월
근제 청양군수 이 병 준
건립 청양군수 이 병 준
해 문 향토사학자 윤 경 수
항일투사 윤병환 선생의 자는 군범으로 칠원윤씨이다. 공은 고려 명상 충효공 환의 19世로 부친인 문학과 예안김씨 사이에서 1889년 3월 3일 청양군 청남면 지곡리 222번지에서 태어나셨다. 유년 부터 품성이 강직하고 언행이 바르며 집에서는 효심이 돈후하고 근면 성실 하여 친우 간에도 신망이 있어 인근 주민들이 따르는 이가 많았다. 공의 유년 시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민족의 설움이 극에 달하는 고난 시대에 살면서 항시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된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고자 우국의 충정을 불사르며 암투하다가 1919년 을미 3월 31세 때 독립운동만세의 함성이 전국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자 향리 이동명과 함께 지곡리 당산에서 동민대중을 선동하여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그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청남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을 행진하며 일제의 학정을 규탄 하던 중 정산주재 일본헌병의 출동저지로 시위 대중이 해산 되었고 주동자인 공과 이동명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당년 4월 공주지방검찰청에 송치되어 6개월 징역언도를 받고 복역하였다. 출감 후 지곡리에 귀향하여 조선 민족의 단결을 호소하며 겨레의 독립이 우리의 최대과제임을 역설하며 오직 항일사상의 고취와 민족의식의 개선을 부르짖었다. 공은 구국일념으로 통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8.15 광복절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48년 6월 11일 향년 60세로 별세하시니 묘소는 장평면 은곡리 외차산유좌이다. 배는 순천박씨이고 4남 2녀를 두시니 자 길원.조원.인원.영원이 있고 여로 단양인 우종억과 김해인 김경환이다 공은 1979년 2월 정산향교전교 김만영 찬의 기미독립투사묘비와 동년 4월 청양군수 박찬무 찬의 항일7투사비가 있고 1992년 3.1절을 기하여 건국공로로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음으로 공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빛내기 위하여 여기 항일투사의 출생지에 그 사적을 새겨 이 비를 세운다
1993년 11월 일
청양군수 이 병 준 근수
참고문헌)
칠원윤씨 돈본 제10호(2018. 윤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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