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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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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을 나타내는 문자

한중일(韓中日)은 동아시아에 속하는 국가인 한국[내용주 1], 중국[내용주 2], 일본을 이르는 말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한중일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이웃 나라이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서로가 공유하는 점이 많아 문화지리학, 인류학 등에서 '동아시아'라는 지역으로 묶여 사용되었지만, 미시적으로는 서로가 몹시 독자적이고 다른 구조를 보이고 있어 이를 분석하는 데 다양하게 사용되는 데 한중일이라는 낱말로 축약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중일한"(中日韩), 일본에서는 "일중한"(日中韓)으로 자신의 국가를 가장 먼저 배치시키며, 한중일 국가와 특별한 관계가 없는 나라들은 알파벳 순서대로 배치시켜 "CJK"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명목 국내 총생산 순위, 면적순 순위 등에도 해당한다. 보통 이러한 명칭은 서로 간의 관계에 따라 순서가 뒤바뀌지만, 한국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졌다고 해서 "한일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보다는 "한중일"을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감 및 발음상으로 "한일중"을 말하는 것 보다 "한중일"을 말하는 것이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1][2][3]

한중일은 서로가 "가깝고도 먼 나라"로 항상 평가된다. "가깝고도 먼 나라"란 지리적 및 문화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나라이지만, 국제관계에서는 서로가 그다지 좋지 않은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이 세 나라는 서로가 언제나 공존과 대립을 반복해 왔으며, 각자가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한중일 중 세 나라가 모두 같은 문화를 따르고 있는 경우가 있는 반면, 세 나라 모두 다른 문화를 따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다른 두 나라는 같은 문화를 따르고 있지만 나머지 한 나라는 다른 문화 혹은 독자적인 문화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4][5]

역사[편집]

한중일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절대로 개별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만큼 서로 간의 국가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가까운 나라라는 곳을 반증하기도 한다.

한중일의 역사는 주로 농경 민족의 거주로 이루어져 있지만, 유목민족과의 대립도 꽤 있었던 편이었다. 그러나 농경 민족과 유목민족의 교류는 매우 잦았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는 초원을 무대로 생활하였던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전달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청동기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는 시기는 17세기이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무라이들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조선을 공격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임진왜란(임진년에 왜(倭)가 일으킨 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 및 "항왜원조", 일본에서는 분로쿠의 역으로 불린다. 이 전쟁은 7년간 진행되었던 대규모의 국제 전쟁이었으며,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은 전쟁이기도 하다.

20세기는 한중일에 있어서 모두 암울한 시대였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극에 달해 한중일 삼국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다. 안중근은 이런 상황을 보고 한중일 삼국이 함께 연합하여 교류를 통해 성장해 나가자는 동양평화론을 제시하였다. 이는 오늘날 유럽 연합의 모델과 매우 비슷하다.

지리[편집]

한반도와 중국 대륙, 일본 열도는 농사에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주로 서쪽의 해발 고도가 높고 동쪽이 낮다. 한반도의 경우는 동고서저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국토의 70% 가량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강수량이 풍부한 지역은 벼농사와 농업에 기반하여 발달되었다. 반면 북부 지역, 고원 지역은 강수량이 부족하며 이로 인하여 유목을 하며 생활하게 된다.

문화[편집]

한중일의 문화는 가장 가까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가장 가까운 지역이기에 서로가 비슷하지만, 각자의 문화는 차이점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문화심리학[편집]

한중일의 문화심리학은 아주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동서양' 이라는 개념 아래 한중일이 '동양'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였으며, 서구 국가들은 개인주의를 따르는 것에 대비되어 집단주의를 따르는 것으로 흔히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으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로 나눌 수 없으며, 깊은 수준의 통찰과 탐구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중일 나라는 집단주의라는 대분류 안에 묶이고는 하지만, 한중일의 옛 미술품을 찾아보면 하나의 '집단주의권' 이라고 하기엔 적지 않은 양식의 차이가 있다.

자기가치관[편집]

한중일 국민들의 자기가치관도 매우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만들어진 이누미야 요시유키 등이 개발한 주체성-대상성-자율성 자기 척도에 따르면, 세 나라의 국민은 각자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였을 때 한국인은 주체성 자기가 우세하게 나타나고, 일본인은 대상성 자기가 우세하게 나타나며, 중국인은 자율성 자기가 우세하게 나타난다.[6][7]

한국인의 주체성 자기는 자신이 남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이러한 성향이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높으며, 장점으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위기 상황을 타파하여 나가려는 행동을 하지만 단점으로는 심한 참견과 갑질 등의 힘의 행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이루어져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일본인의 대상성 자기는 자신이 남에게 영향력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인은 이러한 성향이 다른 두 나라에 비해 크게 나타났으며, 이 성향의 장점으로는 사회 구성원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기능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해주지만 단점으로는 방관자와 같은 위치의 사람들이 많아진다.

미의식[편집]

한중일의 미의식은 서로가 몹시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다.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핵심으로, "한국은 자연미, 중국은 과장미, 일본은 정제미" 라고 표현된다.[8]

한국의 전통적인 미의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자연에 대한 조화를 이룬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취급받았으며, 설령 인간의 손길을 타게 되더라도 눈에 띄지 않게 가공이 되어야 했다. 한국 미술에서는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지만 중국의 사례와 다르게 완만한 형태의 곡선을 선호한다.[9] 2020년대 한국에서는 "꾸민 듯 안 꾸민 듯" 이라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인 "꾸안꾸"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애매하게 꾸민 모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요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유행하는 화장법이나 헤어스타일은 대부분 자연스러움을 강조한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도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것을 '촌스럽다' 라고 여긴다.

그 반면 오히려 중국에서는 이러한 화려한 것이나 번쩍거리는 것, 혹은 지나치게 곡선이 휘어져 있는 등 인공적인 미를 선호한다.[9] 중국은 예로부터 인공미라는 것을 중요시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대칭성을 최고의 인공미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중국에서는 좌우대칭이라는 것을 최고의 인공미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은 사자성어, 식사 예절, 고전 등 중국의 여러 가지 생활문화에 영향을 끼친다. 중국 문화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이론 중 하나는 음양오행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흙을 중심으로, 나머지 사행이 대립을 이루고 있다. 음과 양은 대표적인 이원적 대립구도를 이용한 철학 중 하나이다. 이를테면, 하늘과 땅, 태양과 달,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같이 상극이거나 대립과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8]

일본은 모든 것이 직선이거나 기하학적인, 상당히 딱딱해 보이는 디자인을 선호한다. 지상현은 《한중일의 미의식》 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은 매뉴얼에 의지하는 사회" 라고 하며 불규칙하고 울퉁불퉁한 자연환경 속에서 적응하기 위한 생존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매뉴얼 문화로 인해, 구조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고, 일본에 직각 형태의 건축물이 많아졌다고 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형태를 "예술 영역의 매뉴얼 문화" 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9] 한국과 중국은 곡선미가 돋보이는 작품을 만들어내지만, 일본은 직각 형태나 기하학적인 형태, 빈틈없이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우키요에의 파도 형태에 사용된 황금비나 교토 도후쿠지의 젠 정원이 그 예시이다.[9]

한편,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은 한중일의 미술 특징을 한 단어로 요약하기도 했다. 한국의 미술 특징은 '무심함'과 '우연함'(casual), 중국의 미술 특징은 '통제적'(control), 일본의 미술 특징은 '작위적'(contrived)이라고 요약하였다. 이에 한성대학교 디자인대학 교수 지상현은 "한국의 '무심함'과 '우연함'이란 비작위적이면서도 애쓰지 않으려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것을 함유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저서인 '안타고니즘 -한중일의 문화심리학'에서는 '덤벙' 이라는 단어로 지칭했다.[9][10]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조울증형'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모든 것에 수용적이고 외향적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극도로 격식을 차리며 형식에 얽매여있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 문화양식에는 솜씨가 부족한 사람이더라도 석상을 제작하는 것에 참여하곤 했던 것이 보이는데 종교적인 의미가 있어 솜씨가 출중한 사람들만이 제작해야한다고 생각되었던 불상 조차 장인이 만든 것 같은 불상부터 기술이 부족한 사람들이 만든 것 같이 보이는 불상이 공존한다.

조각품[편집]

한중일은 공통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이로 인해 형성된 불교 미술은 상당히 다르다. 한중일에서 오래 전 제작된 불교 조각품들을 보면 그 차이가 가장 드러난다. 일본은 전체적인 기울기가 골반에서 한 번 결정된 후 변하지 않아, 직선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9] 중국과 일본은 사실성이 높지만, 한국의 경우 다소 우스꽝스럽게 표현된다.

중국의 문화재에서 나타나는 곡선적 형상은 사실감을 넘어서는 수준에 달하는 경우가 많다. 조각품으로는 수나라인수조신용, 당나라 대의 여입용, 채회도녀무용 등이 이것에 해당한다. 더불어 한국과 비교했을 때, 특히 동시기에 지어진 건축물과 비교했을 때에도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한국은 석굴암에 있는 나라금강역사가 있다면 중국에는 밀적금강역사를 들 수 있다. 묘사된 금강역사는 힘과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있어 절제된 동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 역동적임은 중국의 조각품에서 더 자세하게 그려진다. 한국의 조각품에서는 사람이 가능할 것 같은 사실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는 반면, 중국의 조각품에서는 실제보다 허리가 과도하게 휘어 있도록 조각되었다.[9] 중국의 것에서 몸통이 과도하게 휘어진 반면, 상대적으로 매서운 표정을 하고 있다. 관찰자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한국의 것은 조금 더 유순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이 두 조각품에서 두드러지는 차이 중 하나인 것이다.[9]

일본의 경우 직선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건칠 기법'이라는 제작기법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발견된다. 그러나 한국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일본에는 이러한 기법이 많이 남아 있다. 본래 건칠 기법은 나무로 뼈대를 세우기 때문에, 이에 맞춰 직선적인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상현은 "통나무를 깎아 만드는 방식을 통해 만든 조각품인데도 자세가 직선적인 것은 생각해보아야 할 대목이다" 라고 하였다.[9]

대상의 묘사 방식 및 두드러지는 점도 다르다. 사천왕상을 예로 들면, 중국과 일본은 사천왕이 매섭고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으며, 보다 사실적이고 위압감을 주는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천왕상은 눈이 튀어나와 있고, 뱃살이 있는 것처럼 조각되어 있는 등, 얼핏 보면 바보같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친근하게 꾸며져 있다. 그리고 한국의 조각상은 중국과 일본의 조각상에 비해 정교하지 못하며 투박하지만, 그에 비해 훨씬 색감이 풍부하고 표현적이며, 화려하다. 이어 지상현은 "일본의 경우 작게 보면 정교하고 사실적이지만 전체를 보면 부자연스럽고 뻣뻣해 보인다" 고 설명하였다.[9]

회화[편집]

한중일의 회화는 주로 자기수양적인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사람을 묘사한 인물화에서 삼국 모두 성리학에서 규정되는 삶의 태도와 연결된 "화론" 이라는 규범으로 이어졌다.

인물화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에서는 유럽에 비해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는 시도를 했다.[11] 서양에서는 별을 묘사할 때도 빛이 뻗어나가는 듯한 형상으로 그리지만,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성조기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국인들은 이 깃발을 꽃이 그려진 깃발이라고 생각하여 화기(花旗) 라고 불렀다. 한국에 별 모양과 비슷한 도라지 같은 꽃이 서식하는 것도 있었지만, 동양에서는 육안으로 별이 보이는 그대로 점처럼 찍혀 있었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컸다.[12][13]

특히 이러한 경향은 한국이 가장 크다. 한국의 인물화를 통해, 오늘날 과거 인물들이 어떤 병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9] 이 영향은 현대에도 영향을 끼쳐, 한국의 액션 웹툰과 일본의 액션 만화의 그림체에서도 한국은 사실적인 구도를 추구하지만 일본은 조금 더 격하고 과장된 구도를 사용한다.

회화를 통해 한중일 삼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엿볼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 책거리 라는 작품에서 책으로 가득 채워진 책장을 묘사하였는데, 이를 통해 지식과 학문에 대한 열망을 그려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책거리는 세계에서 최초로 책을 묘사한 회화 작품이기도 하다.

건축 미학[편집]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자신의 연구논문 《전형적인 문학양식의 형식적 특성으로 본 韓⋅中⋅日 삼국의 심미관》에서, 한국, 중국, 일본의 전형적인 원림 건축 양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14]

중국의 건축양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는 사자림을 예시로 들었다. 중국은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것을 선호하며, 대련의 형태는 하나의 줄과 다음 줄이 같은 수를 이루어야 되기 때문에 이것에 맞추기 위해 온갖 한자 단어를 사용하며, 때에 따라 기기묘묘한 작품이 된다. 사자림 역시 이것이 발현되어 미적 특성이 매우 닮았다고 하였다. 교묘함과 인공적인 과장을 중시하는 심리관이 돋보인다고 하였다.

일본의 건축양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는 금각사를 예시로 들었다. 일본의 하이쿠는 기하학적 정제미를 특징으로 하는데, 어떠한 경우에도 엄격하고 빈틈이 없어야 한다. 항상 17 음절(5+7+5)의 시가 만들어져 있어야 하며, 계절 등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문화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때 금각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엄격하고 정밀한 규격에 기반하여 설계되어 있다.

한국 건축양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는 전라남도 단양군소쇄원으로 예시를 들었다. 한중일 중 가장 두드러지는 국가는 한국의 건축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은 인공적이거나 과장된 미를 추구하였고, 일본은 엄격한 양식 아래 지어진 건축을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한국의 건축은 이와 달리 소박함을 강조하고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소쇄원의 원림 구성은 자연스러운 환경을 그대로 살리는 것에 주목하고 있으며, 주춧돌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고, 원림의 입구에서 보았을 때 그 속에 있는 집의 용머리는 배경이 되는 뒷부분의 산을 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김경은 경향신문 기자는 한국에서 생각하는 좋은 주택관은 "청빈과 청렴", 그리고 이웃간의 좋은 관계로 정의하였다. 다음 내용은 이규태의 《재미있는 우리의 집 이야기》에 실린, 조선시대의 유행했던 선비들의 말장난이다.

큰 집을 '옥'()이라고 하고 작은 집을 '사'()라 하는데 '옥'자를 풀어보면 주검()에 이른다()는 말이요, '사'자를 풀면 사람()이 길하다()는 말이니, 큰 집에 사는 사람은 화를 입게 되고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15][16]

이와 같이, 한국의 선비들은 전통적으로 물욕을 멀리하고 탐욕스럽게 행동하지 않는 것을 우수하게 쳤다. 이규태는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에서 옛날에는 품위와 품격을 갖춘 선비를 '헛가비 선비'라고 했는데 이때 헛가비 라고 하는 것은 요즘 말로 판잣집을 뜻한다고 하였다. 조선의 진짜 선비는 비를 막을 수 없는 누추한 집에서도 넉넉함을 느끼며 살았다.[17] 세종은 초가집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옥좌에 오른 뒤 초가집에서 2년 3개월 동안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를 무렵 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7년 이상 굶주리게 되었는데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임금이 기왓장을 지고 누워 잘 수 없다"는 말을 하며 경회루 옆에 초가집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신하들은 화재와 안전, 건강 등의 문제를 들며 반대를 하였지만 세종은 경복궁에 있는 낡은 자재를 재활용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세종은 백성과 아픔을 함께 하겠다고 하며 침소와 집무실로 삼았다. 소헌왕후는 초가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초가집 생활 청산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도중에도 세종의 신하들은 세종을 위하여 더 좋은 수준의 거처를 마련하려 하지만, 세종은 오히려 자신이 명한 것이 아니면 어떠한 것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도 존재한다.[18][19]

한국은 특히 산자락의 초가집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말이 있다. 이규태는 초가집을 정과 인심이 교합하는 지점이라고 말하였다. 정희 통화하는 곳은 조화와 안정과 번영이 약속된 장소라고 규정한다. 한국에는 단순한 주택에도 공생적인 철학을 부여한 것이었다. 한국어에서도 "집을 사면 이웃을 본다"라는 속담이 존재한다. "집을 살 때는 무엇보다도 그 이웃의 인심과 환경을 보고 사야 한다." 라는 뜻이다. 비슷한 속담으로, "팔백 금으로 집을 사고 천 금으로 이웃을 산다", "세 닢 주고 집 사고, 천 냥 주고 이웃 산다"[20][21][22][23], "집은 천 냥, 이웃은 만 냥"[24] 이라는 표현도 있다. 이와 같은 말들은 집 자체보다도 주위의 이웃을 더 신중히 가려서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는 내용을 함의한 속담이 수많은 변형을 통해 존재한다.[25][26][27] 풍수지리에 기초하여 좋은 곳에 집터를 잡는다고 하여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풍수는 좋지 않게 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집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적혀 있지만, "아무리 살기 좋은 곳이라도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으면 오래 살 곳이 아니다"라고 적혀 있다. 인심이 좋지 못한 곳은 명당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또, "사람 살 곳은 골골이 있다" 라는 속담도 존재한다. 이 세상 어디에 가나 서로 도와주는 사람들과 그러한 관습이 있다는 뜻이다. [28][29]

농경 문화[편집]

한중일이 포함되어 있는 동아시아 지역은 대부분 바다보다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에 맑은 날이 많고 사계절이 뚜렷하며 각 계절 간 기온의 차이가 심한 탓에 밭 농사가 발달되었다. 결국 세 국가는 농경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한반도 남부, 중국 대륙 남부,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지역에서는 주로 집약적 논농사가 발달하였지만, 한반도에서 함경도를 제외한 북부, 중국의 중부와 북부에서는 집약적 밭농사가 발달하였다. 대체로 북위 40도 이하의 지역에서는 강수량이 400mm가 넘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30]

한중일 중에서 가장 먼저 농사를 지은 곳은 중국이었다. 황허강 유역에서 기장이나 와 같은 작물을 재배하였다. 황허강 유역은 토지의 영양분이 축적되어 있고 홍수가 자주 일어났지만 그 덕분에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를 짓기 수월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척박한 땅 때문에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람이나 동물의 배설물을 사용하여 토지의 양을 보충하는 일이 가능하였다.[31]

한반도 북부 지역의 농업은 밭 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부여 및 고구려 등과 같이 한반도 북부에 세워졌던 나라들은 냉랭한 기후로 인하여 밭농사로 잡곡을 재배하고 가축을 키웠다. 이에 더하여 유목과 사냥을 함께 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에서 벼농사는 기원전 6,000여 년 전 양쯔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30] 농사의 경우는 가장 오래된 콩 재배 흔적이 한국 및 한반도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재배는 민무늬토기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2][33]

기존에는 조, 피, 수수를 재배하며 살아갔으나 이후에는 벼가 더 많이 재배되었다. 이러한 까닭은 벼는 다른 곡물보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고, 영양소가 풍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인구 부양력이 몹시 높아 사람들은 다른 작물들보다 벼를 선호하게 되었다.

농사는 처음에 초목을 태워 벼를 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시간이 지나 그곳에 논을 만들고 벼를 심는 기술이 등장하였다. 논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으면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을 대는 과정에서 논의 영양분이 추가로 공급되기 때문에 토지의 양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농사를 계속 지을 수도 있고, 수확량도 많으니 밭농사보다 벼농사가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

농사 초창기에는 벼를 품종별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한 곳에 수확 시기가 다른 여러 가지 벼를 심었다. 따라서 한꺼번에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익어있는 벼를 뽑아 수확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달 돌칼이 만들어졌다. 중국에서 시작된 벼농사는 한반도, 일본 열도, 베트남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밭농사를 하던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였지만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벼 농사를 시작한 논 유적이 발굴되었고,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었던 저수지 유적도 남아 있다.

한편 일본의 벼농사가 전래된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론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한반도와 중국 남부에서 바다를 통해 일본 규슈 지방에 전달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벼농사의 전래는 집단의 이주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단지 벼 품종뿐 아니라 경작 방법, 농기구, 문화 등도 함께 전달되었다. 돌널무덤과 같은 매장 방식까지 한반도와 규슈 북부 지역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한반도 지역의 고구려는 유목을 많이 한 국가였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서 고구려를 설명하는 부분에 "좋은 밭이 없어 아무리 농사지어도 배를 채우지 못한다." 라는 기록과 함께 "매우 거칠고 약탈을 좋아하며 성질이 급하고 걸음도 뛰듯이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지역은 농사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목이 발달되었는데, 유목민들은 교역 및 유목만으로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식량이나 생필품이 모자라면 능숙한 기마술을 바탕으로 하여 농경민들을 위협하였다.

음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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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의 공통적인 주식은 을 기반으로 한 문화이다. 이것은 서구권의 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문화와 대비되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들에게 질문을 할 때, "밥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중국인과 일본인은 "밥을 먹으면 여러 가지 반찬과 함께 먹을 수 있다" 라고 답하고, 한국인은 "영양가가 높아서"라고 답한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문화에서 밥은 가장 기본적인 음식이며, 밥을 주식으로, 반찬을 부식으로 먹기 때문이다. 밥은 가장 기본적인 음식이기 때문에 첩에서도 하나의 음식으로 계산하지 않는다.[4][5]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도 이와 같이 생각될 정도로 한국의 음식 문화는 주식과 부식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한국의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밥과 반찬이 함께 나오며, 밥과 반찬을 따로 계산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과 중국에서 주식과 부식의 구분은 약하다. 중국과 일본에서 운영되고 있는 한식 전문점은 반찬의 값을 따로 받는다. 이것은 밥도 여러 요리 중에 하나일 뿐이며, 반찬(부식)과 구분되는 별개의 요리로 취급되기 때문이다.[4][5]




중국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형태의 요리가 발달되어 있으며, 56개의 다양한 민족을 받아들인 식문화를 가지고 있다.[34]

일본 역시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형태의 요리가 있으며, 해산물과 채소 요리가 발달되어 있다.[34]

육류 문화[편집]

육식 문화의 경우 한국은 소고기를 많이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아 고기를 도축하는 방법 역시 발전되지 못하여 고기 요리가 발달하지 못했다. 송나라서긍고려도경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35]

夷政甚仁好佛戒殺故非國王相臣不食羊豕豕亦不善屠宰唯使者至則前期蓄之及期將用縳手足投烈火中候其命絶毛落以水灌之若復活則以杖擊死然後剖腹腸胃盡斷糞穢流注雖作羹肉而臭惡不絶其拙有如比者


徐兢, 『高麗圖經』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이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에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장위를 다 끊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 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서긍, 《고려도경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의 강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고기를 먹는 문화가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불고기, 너비아니와 같은 궁중 음식부터, 소머리국밥, 곱창 등 소의 다양한 부위를 사용하여 조리하는 방식이 발달되었으며, 한국의 소고기 요리는 중국이나 일본의 요리보다 발달되어 있다.[36][37][38] 돼지고기 요리도 많이 발달했지만, 주로 제주도에서 발달되었다. 한국은 전반적으로 소고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지만, 광우병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소고기는 더 이상 서민들의 음식이 아니게 되었다. 소고기의 빈 자리는 돼지고기가 차지하여, 삼겹살과 같은 돼지고기 요리가 인기를 얻게 되었다.

중국은 반면 돼지고기 요리가 비교적 더 발달되어 있다. 궈바오러우부터 시작하여, 동파육, 탕추러우 등의 요리가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은 오랜 기간 지배했던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육류가 천년 가까이 금지되어 육류 요리가 발달되어 있지 않지만, 어패류해산물 요리가 발달되어 있다.[34] 그러나 일본 농림수산성의 발표에 따르면 2020년대 들어서 일본에서도 육류 및 유제품 소비 성향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어패류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였다.[39]

차 문화[편집]

한중일의 차 문화는 서로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인다.

차 문화의 중심지는 중국이다. 중국은 5천년 전 부터 차를 재배하고 있었지만 초창기 중국의 차에 대한 인식은 약초에 가깝고 음료가 아닌 약으로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통설이다. 중국 역사에서 문헌상 나타나는 음다법 기록은 삼국시대장읍이 지은 《광아》이다. 고대 중국에서 차를 마실 때에는 병차를 붉은색이 나도록 굽고 찧어서 가루를 낸 후, 자기 속에 넣고 끓는 물을 붓고 양념으로 파, 생강, 귤 등을 넣어 마시는 것이었다.[40]

차 문화를 크게 발전시킨 인물 중 하나로 육우가 꼽히는데, 여러가지 음다법을 저술하였다고도 알려져 있다. 제다법, 음다법이 체계화되도록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며, 오늘날 중국의 자다법이나 전다법의 개념을 확립시킨 인물이기도 하다.[40]

육우의 시대는 떡차 중심으로 발달되었으나 송나라 대에 들어와서 단병차를 달이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단병차 방식이 발달한다. 당나라 대 부터는 자다법에서 점다법으로 변해갔다. 점다법이란 고형치를 다마 차맷돌로 부드럽게 잘 간 다음 그 가루를 찻사발에 넣고 연고와 같이 끈적끈적하게 만든 후, 적당히 끓인 물을 부어 차선이란 다구로 잘 저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방법이며, 이는 지금의 말차 마시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40]

일본의 차는 문헌 기록상으로 차 나무의 자생설과 전래설이 있는데, 학계에서는 대체로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파악한다. 확실한 자료는 없으나 나라 시대에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견당사나 중국, 인도 등지에서 일본으로 간 승려들에 의해 단차가 일본으로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40] 일본의 다도 문화는 에이사이 선사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데, 에이사이 선사가 송나라 유학길에서 돌아오면서 말차법이 오늘날까지 일본 다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한국은 고려 시대까지 차를 주로 소비했지만, 조선 시대로 들어오며 숭유억불의 영향을 받아 차를 상대적으로 마시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음료는 커피가 되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 차에 대한 문화는 거의 사라졌으나, 고려 시대 당시 향유되었던 문화가 남아 있다.[40]

국수 문화[편집]

[41]

만두 문화[편집]

한중일 세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음식 문화 중 하나는 만두 문화이다. 만두는 중국에 밀이 전해졌을 때부터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국에서 만두라는 것은 안에 고기나 채소 등의 소가 들어간 음식을 지칭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만두라는 한자를 오로지 밀가루 반죽을 뭉쳐 끓는 물 위에 쪄낸 것을 만두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부르는 '만두'는 중국과 일본에서 교자(餃子)라는 명칭으로 통한다. 이것은 다른 언어에서는 다르게 지칭하는 것으로 취급되는 가짜동족어의 예시 중 하나가 된다.

중국에서는 만터우와 자오쯔를 구별하는데, 만터우는 밀을 뭉쳐 찐 음식을 말하고, 자오쯔는 만두피 속에 고기나 야채 등의 만두소가 들어가 있는 음식을 말한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자오쯔는 가장 맛있고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음식으로 취급된다. 중국의 민속학자 자오지엔민(赵建民)은 중국인들이 자오쯔를 좋아하는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로 미식과 경건과 정성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너그럽게 감싸는 심리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미적 기준을 충족시켜주는 아름다움이라는 측면에서 자오쯔를 즐겨 먹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어령은 저서 '가위바위보 문명론'에서 중국을 보자기에 비유했는데, 대륙이라는 넓은 특성과 동시에 다른 민족을 포용 및 관용, 즉 '감싼다'는 역사적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42] 세 번째로 중국인들의 사회적 공리적 정신을 보여준다고 한다. 자오쯔를 제사할 음식으로 올리는 것은 자오즈를 제사에 사용하는 후손들에게도 복이 돌아온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사람 사이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직설적인 언어로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자오쯔의 무언가를 싸는 모양은 심리 세계를 은밀하고 은유적으로 나타낸다고 한다.[43]

음식 중심 국가인지도[편집]

중국과 일본의 요리는 다른 나라에 불도장, 궈바오러우, 스시, 타코야끼 등으로 대표되는 고급 음식이나 길거리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2020년대까지의 한국 음식은 비교적 저평가되고 있었다.[44][45] 많은 지자체의 홍보나 여러 시민단체의 홍보, 심지어는 정부의 세금을 들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음식은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나 바가지요금으로 인해 비싸고 맛 없는 음식,[46] 번데기와 같은 괴식으로 알려지거나, 부정적인 인상을 가진 음식으로 취급되며 오해가 쌓여갔다.[47][48] 심지어 한국 음식을 먹는 방식이 알려지지 않아, 미국에서는 한국 음식이 맛없다는 편견이 있기도 하였다. 보통 미국의 식문화는 모든 음식을 따로 먹으며, 음식을 섞어서 먹어야 하는 한국 음식을 따로 먹어 오해가 번지는 것이다.[49] 이와 같은 몇몇 문제는 공론화가 되어 한국인들 사이에서 고쳐야 할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2020년대부터는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 음식도 서서히 인기를 얻고 있다. 2023년 9월 미국에서는 '트레이더 조'에서 개발한 참기름 냄새를 뺀 김밥틱톡 챌린지의 영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50] SBS에서 인터뷰를 한 결과, 미국에서는 참기름이 스컹크의 냄새와 비슷하다고 하여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적절한 지역화를 거쳐 참기름 특유의 향을 제거한 후 김밥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51]

이러한 음식 중심 국가인지도는 연구 자료로도 활용되었다. 영어 위키백과의 검색어 및 문서 조회수를 비교하여 국가 인지도를 조사하는 작업이 있었는데, 중국이 음식 관련 문서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고, 일본 역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한국은 유의미하게 낮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다.[52]

식문화[편집]

한중일의 식문화 역시 매우 다르다.

젓가락[편집]

한중일은 공통적으로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형태는 몹시 다르다.

한중일의 젓가락은 서로가 다른 양상을 띤다. 젓가락이라는 단어를 ""라는 한자로 사용하지만, 한국에서는 "", 중국에서는 "틀:Ruby/styles.css 문서에 내용이 없습니다. (zhù)", 일본에서는 "はし"라고 읽는다.[53]

그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형태의 젓가락은 한국의 젓가락이다. 한국의 젓가락은 다른 젓가락 문화권 국가들과는 달리 나무가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지며, 숟가락과 함께 사용한다. 그리고 밥을 집을 때, 중국과 일본은 젓가락을 사용하는 반면 한국은 숟가락을 주로 사용한다. 단, 숟가락의 용도는 그 빈도가 다를 뿐, 한중일 모두 숟가락으로 밥을 떠 먹는 것은 같다. 중국 및 일본의 숟가락은 형태나 카레라이스와 같은 음식에서 사용한다. 중국의 젓가락은 동그랗고 굵으며, 가장자리가 뭉툭하다. 기름진 음식이 많은 음식을 잘 집기 위해서이고 큰 식탁에서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젓가락은 앞쪽이 뾰족해 국수해산물, 생선을 먹기 편하게 되어 있다. 김치, 나물과 같은 절임 채소 반찬을 먹는 한국의 경우, 젓가락 앞쪽이 납작한 모양이며 대부분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숟가락이 젓가락을 보완한다.[54][55]

중국인, 일본인, 같은 젓가락을 사용하는 베트남인들 역시 젓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안에 넣는다. 음식물을 젓가락으로 집어 나르는 거리를 줄여서 음식물을 도중에 떨어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밥그릇을 입에 가까이 댄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왕은 음식물을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식사를 마치기 위해서 밥그릇을 들어 입에 대고 먹는 것은 실용적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그 반면 한국에서는 늘 숟가락과 젓가락을 하나씩 사용한다. 숟가락을 쓰거나, 젓가락을 쓸 때 모두 한 손, 오른손에 쥐어서 사용한다.[55]

하지만 동아시아의 젓가락 문화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줄고 있으며, 서양 문화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보고가 나타났다.[55]

의복 문화[편집]

한중일의 전통 의상은 한국은 한복, 중국은 치파오, 일본은 기모노가 대표적이다. 각 의상은 서로 고유의 특징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각 국가에서 선호하는 색상 톤 역시 존재한다. 한광석 쪽물염색 기능보유자가 말하기를, 한국의 경우 청바지 색과 비슷한 데님 색 같이, 일반적으로 밝고 가볍거나 파스텔 톤을 띠는 하늘색보다는 울트라마린, 로열 블루와 같이 깊고 진한 푸른색(군청색 계열)을 선호한다고 답했다.[56]

건축[편집]

한국은 냉대 기후였기 때문에 난방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온돌의 경우 인류 최초의 바닥 난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형식의 난방으로 손꼽힌다. 온돌은 아궁이에서 불을 때워 요리를 하면 그 잔열로 바닥을 데우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서양의 벽난로와 다르게 열이 새지 않으며, 잿가루가 방 안으로 들어올 염려가 없어 높게 평가된다. 이러한 온돌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3세기부터 등장한다.[57] 그러나 온돌은 매우 무거웠기 때문에 전근대 시대에 복층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의 도입으로 인해, 사치를 금하게 되어 복층 건물을 짓는 것은 재산의 낭비라고 여겨, 복층 건물을 짓지 않게 되었다.그 때문에 한옥은 복층 형식보다는 단층 형식의 건축이 많았다. 하지만 현대 시대에 들어와 복층 한옥을 지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58] 대한민국의 건축가 유현준은 동아시아 지역의 불규칙한 강수량이 흙을 무르게 하여 고층 건물을 짓기에 적합하지 않고, 디자인 상으로 동양식 건물이 복층 구조를 지니게 되면 비율이 좋지 않아, 미관상 좋지 않다고 말했다.[59][60][61][62]

전통 건축양식[편집]

한국, 중국, 일본의 건축 문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세 나라가 몹시 닮아 있지만,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내부 구조는 확연히 차이가 나게 된다. 수렴진화로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자신의 집을 몹시 개인적인 공간으로 여기는 데에 비해, 한중일 국가에서는 사적인 공간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다소 적다. 한중일 국가의 전통 건축 양식은 서양의 전통 건축 양식보다 훨씬 개방적이며, 집안에서 거주자가 하는 행동이 밖에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양 가옥에서 담이라는 개념이 개입되면 가옥의 개방성이 사라진다. 김경은에 따르면, "어느 학자는 이것을 개인적 집단주의라고 규정하였다" 라고 하였다. 한중일 국가에서는 자신의 소속 집단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공유하고,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소속 바깥에 있는 상대에게는 배척과 외면이 따른다. 중국의 옛 도시 사합원은 방벽이 곧 담과 같으며, 북방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다층형 집인 토루는 그 자체가 요새가 됐다. 사무라이들이 사는 일본의 저택과 성도 마찬가지다.[63]

이 세 나라는 모두 남녀 구분과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그러나 가옥이라는 환경 안에서는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가정과 사회를 나눈 것이다. 한국의 한옥은 안채사랑채를 두고 남녀칠세부동석의 개념 아래 남녀 구별을 확실히 하였다. 그러나 가옥의 중심은 가장이 거주하는 사랑채가 아니라 그 아내(안주인)의 방인 안채이다. 가옥 배치에서는 여성의 위상이 더 높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에서는 사회와 가정이 구분 지어지는 것이다. 중국은 성별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세대와 가구별 구분을 한다. 그 대신 세대와 가구의 질서는 철저하다. 가족의 위계에 따라 방의 위치와 크기를 달리한다. 일본은 이에(틀:Ruby/styles.css 문서에 내용이 없습니다. (いえ)) 라는 독특한 가족 제도가 가옥 배치와 구성의 영향을 미쳤다. 가족 구성원들은 각 가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거주하는 방의 위치가 달라진다. 일본 가옥은 아예 여성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64]

현대[편집]

현대 건축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 모두 건축 양식을 부르는 말이 다른데, 그 중 하나가 아파트이다. 아파트는 한국에서 고층 다세대 건물을 뜻하며, 주기적인 관리 등으로 중산층의 상징으로 자리잡혀 있다. 한국에는 아파트가 1,000만 채가 넘으며, 국민의 60% 가량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65][66][67][68][69][70]

그러나 일본에서 '아파트'는 1960년대 일본의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생겨난 공동임대주택을 지칭한다. 그 반대로, 한국에서 지칭하는 아파트의 개념은 '맨션'이라고 한다. 일본은 '잇코다테'(一戸建て) 라고 하는 단독주택이 많은데, 2015년 닛케이신문과 2023년 NHK에 의해 낮은 수준의 난방 문제가 제기되었다.[71][72] 일본은 220V 전원을 사용하는 한국, 중국과 달리 110V 전원을 사용하는데, 지진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73]

한편, 중국은 '돌집'이라고 하는 독특한 분양 방식이 있다. 중국에서 '돌집'은 구조물의 형태만을 분양받는다. 이 시설은 전기나 수도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고 문과 창문, 인테리어 전체가 없다. 이 건물을 구매한 입주자가 스스로 관리하며 맞춰야 한다. 분양받거나 매수한 집주인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실내장식을 한다.[74][75]

풍수지리[편집]

한중일 세 나라는 농경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연과 계절을 이해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파생된 문화는 풍수(風水) 개념인데, 이것은 집의 위치나 방향에 따라 좋은 집과 안 좋은 집이 나뉘는 것을 뜻한다. 풍수는 장풍득수가 줄여져 나온 말로, 중국 동진의 곽박이 쓴 장서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8]

풍수라는 개념은 국가 정치에도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었을 당시 이성계한양을 풍수지리의 이론에서 가장 왕기가 강한 지역으로 선택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풍수라는 개념 아래 에도를 수도로 선택하였다.[8]

그러나 한중일 사이에 널리 퍼진 풍수지리설은 서로 차이가 난다. 중국과 일본은 주로 물을 중시하였지만 한국은 산을 중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일본은 중국보다 집의 위치(양택 풍수)를 조금 더 신경 쓰는 형태로 발달되어 있다. 특히 일본은 두 나라보다 더욱더 물에 대한 것을 중시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사신도 현무(주산, 主山)를 제외하고 주작(연못), 청룡(흐르는 물)은 물과 관련되어 있다. 백호는 큰 길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사신수 모두 산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집의 위치보다는 묫자리(음택 풍수)에 더 큰 의미를 두기도 한다.[8] 한국에서 사용되는 관용어구 중에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라는 관용어가 있다. 이것은 죽음을 맞이한 대상을 좋은 자리에 묻어 주었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 등지에서 주요 인물의 죽음 이후 이 관용어를 사용하며 끝맺음하기도 한다.

집의 방향은 일본이 가장 이질적이다. 한국과 중국은 집에 방향이 남쪽 혹은 남동쪽으로 향하게 만들어지는 반면, 일본은 북쪽을 향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자연재해 때문인데 한국 및 중국은 편서풍의 영향으로 북서쪽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고비 사막에서 날아오는 황사가 불어닥치면, 집이 바람을 막기 위해 등지게 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태풍 때문에 집이 북향을 향하게 된다.[8]

한중일의 풍수지리 비교
비교 한국 한국 중국 중국 일본 일본
자연물 width=20% 틀:Okay
다르다.


집의 방향 남향~남동향 남향~남동향 틀:Okay
태풍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북쪽을 향하는 집이 더 좋은 집으로 평가받는다.[76]
집의 위치

건축 양식[편집]

김경은 경향신문사 기자는 각 국가의 건축 양식을 하나의 핵심 단어로 정리하였다. 중국 거주 문화의 핵심은 '생존'이었으며,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투쟁, 그리고 투쟁 끝에 오는 지혜가 사합원 속에 배어 있다고 하였고, 일본의 주거 문화 코드는 '변형'이라고 하였다. '나가야'는 '고야'의 변형이며, 다다미는 방석에서 변형되어 방 테두리만 다다미를 깐 '오키다다미'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융합과 공존'으로 정리하였다. 남방 문화와 북방 문화를 융합된 마루온돌, 자연주의 사상과 유교사상이 공존하는 가옥 구성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한다.[8]

종교[편집]

토속 종교[편집]

유교 및 성리학[편집]

한중일 뿐만 아니라 유교를 받아들인 아시아 나라에서 유교는 신앙에 바탕한 종교가 아닌 일종의 도덕 관념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유교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나타나는 내세관이 나타나지 않으며,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나 동식물 등 자연물보다는 사람을 중요시하였다. 이때문에 보다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면을 보이기도 한다. 공자는 "사람은 현재의 삶은 다 알지 못하며, 죽음 이후의 삶을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이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이 참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러한 성격 탓에 동아시아에서는 유교가 일종의 종교로 취급되는 것 보다는, 도덕관념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유학자들은 기독교의 신부나 사제, 불교의 스님처럼 성직자의 역할보다는 학자의 속성을 더 많이 띠고 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조상들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그들을 기리는 것이다. 종교의 대입하자면, 조상숭배 형태에 가깝다. 공자는 자신의 저서 논어에서 조상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였기에, 유교에서는 조상 및 선대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성리학은 조선의 지배 이념과 같았다.

철학[편집]

민간 철학[편집]

한국은 천지인 사상이 기반으로 되어 있었고 중국은 음양오행설이 기반으로 되어 있었다.[8]

언어[편집]

한중일의 언어는 가까운 지역에 형성되었지만, 어족 상으로 매우 다른 양상을 띤다. 중국어는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해 있고, 일본어는 일본어족에 속해 있으며, 한국어는 기원을 알 수 없지만 고립어라고 주장하는 측과 한국어족이라고 주장하는 측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언어유형학적으로 교착어에 속하지만, 중국어는 고립어에 속한다.

언어에서의 동물[편집]

한중일의 속담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동물들은 돼지, , , , 호랑이, 등이며, 특정 동물들의 조합에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77]

호랑이는 긍정적으로는 군자, 용맹하고 강한 사람을, 중립적으로는 무신을, 부정적으로는 무서운 사람, 강하지만 악한 자 등의 사악한 자를 상징하지만, 일본에서는 동시에 술주정꾼, 술에 취해 무서움을 모르는 상태인 사람을 상징하기도 한다.[77] 한국에서 술을 마셔 인사불성이 된 상태가 되면 속된 표현으로 '개가 된다' 라고 표현하지만[78][79] 일본에서는 '호랑이가 된다'(虎になる)라고 표현하기도 한다.[80][81][82] 이와 같이 한국에서는 가장 뛰어난 동물로 호랑이를, 가장 천한 동물로 를 꼽지만, 일본에서 호랑이는 인사불성이 된 상태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술을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 무서움을 모르는 상태인 사람을 "개"라고 속되게 표현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이다. 한국어, 중국어에서 가장 대조되는 동물 표현은 '호부견자' 라는 성어와 "개 호랑이가 물어 간 것만큼 시원하다" 라는 속담이 있다.[83]

호랑이는 한국 문화, 한국어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일본에서 호랑이는 서식하지 않는 동물이기에, 한중일 언어 중에서 일본어는 호랑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낮다. 그 대신 그 지위는 보통 가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강한 사람이나, 군자, 왕과 같은 사람을 비유하는 데 쓰인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속담 중에 '호랑이'를 뛰어난 사람으로, '토끼'를 약자 혹은 뛰어나지 않은 사람으로 표현하곤 한다. "호랑이 없는 골에서는 토끼가 왕"은 "뛰어난 사람이 없는 곳에는 그저그런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된다는 뜻"의 속담이며, "토끼가 호랑이 걱정한다"는 "쥐가 고양이를 불쌍히 여긴다"에서 파생되었으며, 원래 속담과 똑같이 "약자나 탄압받는 소수가 자신을 억압하려는 세력을 응원한다"는 의미를 가진 속담이다.

일본에서는 "매가 없는 골에서는 박쥐가 왕(鷹のない里の蝙蝠)"이나, "매 없는 세상에서는 참새가 매 노릇 한다(鷹の無い国では雀が鷹をする)", "매 잠잘 때, 새나 참새가 떠든다(鷹いねぶるとき、 鳥雀かまびす)", "솔개가 매를 낳다"(トンビが鷹産んだ)와 같이 '매'를 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박쥐참새를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솔개'를 보통 사람으로 표현한다.[77]

중국에서 사용되는 속담 중에 "호랑이 없는 산에서는 원숭이가 대왕 노릇한다"(山中無老虎、 猴子称大王) 라고 하며 '호랑이'를 주축으로, '원숭이'를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표현하는 속담이 있다.[77]

그 중에서 한중일 속담에 다른 두 동물이 짝을 지어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 호랑이가 이에 해당한다.

은 한국에서는 "두 동물의 다름"을 나타내며, 중국에서는 "가치의 차이", 일본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다름"과 "가치" 모두를 나타내지만, "가치"에 조금 더 초점을 두는 양상을 보인다. 한국의 속담 중에서 "말 삼은 소 신[짚신]이라"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말이 만들어낸 소의 신발이라는 뜻으로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 못 쓰게 되었다" 라는 뜻을 지닌다.[84] 그 외 합당하지 않은 말로 지껄임을 이르는 말로 "말 살에 쇠 살", 피차간에 아무 관련성이 없이 얼토당토않음을 이르는 말로 "말 살에 쇠 뼈다귀"가 있다.[84] 한국어에서의 말과 소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서로가 다른 동물이라는것을 강조하는 것에 사용되며 이는 곧 "다름"을 나타낸다. 또, 말의 경우에는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라는 속담 등에서도 그 존재 자체를 다른 것으로 표현하는 것에서도 사용된다.[77]

중국어에서는 두 동물의 "가치 차이"를 나타낸다. "남에게서 소를 받으면 말을 돌려주어야 한다"(틀:Ruby/styles.css 문서에 내용이 없습니다.得人一牛, 還人一馬 (dé rén yī niú, hái rén yī mǎ), 남의 호의를 받으면, 적게나마 호의로 보답해야 한다)"나, "욕심으로 다른 사람의 소를 빼앗으면 자기 집에 있는 말이 도망간다"(틀:Ruby/styles.css 문서에 내용이 없습니다.貪得他人牛、 失去自家馬 (tān dé tā rén niú 、 shī qù zì jiā mǎ)), "말을 타지 않고, 소도 타지 않고, 작은 나귀를 타고 중간에서 큰 흐름을 따라간다(不騎馬、 不騎牛、 弄個毛驢児在中隋大流)" 나, “상등의 말을 타고 어중간한 소를 쓰는데, 사람은 하등인을 부린다.(騎馬上等 馬、 牛用中等牛、 人使下等人)"등의 속담이 해당한다. 여기서 소는 말보다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존재로 등장한다.

일본어에서는 "소는 소끼리, 말은 말끼리"(틀:Ruby/styles.css 문서에 내용이 없습니다.牛は牛連れ、馬は馬連れ (うしはうしづれ、うまはうまづれ)), "말을 소로 바꿔 타다"(馬を牛に乗り換える) 등의 속담을 보아 두 동물의 의미가 "두 동물의 다름"과 "가치의 차이" 모두를 나타내는 경향을 보인다.

용과 호랑이의 경우 한중일 모두에서 사용된다. 한국의 '무슨 일이나 뜻한 바를 다 이룰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용이 여의주를 얻고 범이 바람을 탐과 같다",[85][86] '두 강자의 싸움'를 뜻하는 용호상박, 일본의 '분노를 사다'를 표현하는 "용의 수염을 쓰다듬고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龍の鬚を撫で虎の尾を踏む)등이 이에 해당한다.

논문 《동아시아 소화 (笑話)⋅ 속담 (俗談) 속의 동물조합 상징성 비교》에서는 중국과 일본은 동물들이 비슷한 상징성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각 문화권마다의 상징성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77]

  1. 중국과 일본의 경우, 해당 동물과 조합하는 상대동물간의 '가치'를 비교하려는 경향이 눈에 띄는 반면 한국에서는 '다름'을 비교하려는 경향이 보였다.
  2. 중국과 일본의 경우 동물의 외형적 행동적 특성에 착안한 의인화 상징이 무척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동물의 외형적 행동적 특성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성별 및 연령별 특성을 의인화 상징하는 방식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음을, 일본의 경우 같은 종의 암수 동물 한 쌍을 통해 남녀 성별을 상징하는 방법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3. 중국과 일본의 경우 동물 신체 상징이 비교적 발달하였다. 신체 부위 상징성은 해당 동물의 다양한 외형적 행동적 특성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문화권에서의 해당 동물에 대한 관심도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속담이나 관용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동물을 통해 어떠한 동물에 대한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쥐꼬리만 하다", "쥐방울 만한", "쥐뿔도 없는"과 같은 쥐 신체관련 표현이 발달했으며, 일본에서는 "고양이 이마처럼 좁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 "고양이 혀"처럼 고양이의 신체와 관련 속담과 표현이 발달하였다.

중국 역시 개와 관련된 속담이나 관용구가 다수 존재하는데, "개가 쥐를 잡다"(狗拿耗子, 쥐를 잡는 것은 고양이의 일이나 개가 잡았다, 즉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다'), "개는 똥을 먹는 것을 고칠 수 없다"(狗改不了吃屎,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등이 있다.

문자[편집]

한자[편집]

한중일은 공통적으로 한자를 사용한다. 한중일의 언어는 고유어 면에서는 닮은 점이 그다지 보이지 않지만, 한자어 부분에서는 발음 상으로 닮은 점이 몹시 많이 나타난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는 한자는 서로가 다른 자형을 사용하며,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한자 역시 매우 많다. 예를 들면, 한국어에서 '책'(冊) 을 뜻하는 중국어일본어 단어는 각각 ''(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Zh/data/zh' not found.)와 ''이다. '冊'은 한국어에서 도서를 뜻하지만 중국어에서는 '책봉하다', 일본어에서는 '책을 세는 단위'(한국에서는 '券')를 뜻한다.

또한 한중일 모두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른 한자어 단어가 매우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애인'(愛人)이 있는데, 한국어에서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중국어에서는 "결혼한 상대", 일본어에서는 "불륜 상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87][88]

이와 같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거나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한자가 사용되는 경우가 몹시 많아, '한중일 공통한자'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한중일 공통한자는 총 808자로 이루어져 있다.[89]

한국어에서 한자어의 비율은 약 50%, 혼종어(예시: 진짜, 가짜. 링크 자료 참조)까지 포함했을 경우 70%에 달하는 어휘가 한자로 구성된 언어라고 보는 시각이 있으며, 외래어의 경우 15~20%에 달하는 비율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90] 동시에 일제 강점기 당시 학술적인 목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영어독일어 낱말을 번역하기 위해 낱말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과장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91] 기계, 민주주의, 시대정신, 공화국, 열등감, 생물 분류의 여러 분류 단계 명칭 등 학계에서 사용되는 한자 낱말이나 몇몇 국가 명칭이 이에 포함된다. 더불어 한국의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국어 단어를 설명할 때 어설프게 설명하거나, 한국어보다 한자어나 외래어 등의 단어를 더욱 많이 수록했으며 순수 한국어의 단어는 다른 한자어나 외래어로 옮겨 단어를 설명한다는 비판과, "러시아 발레",[92] "스루 더 그린"[93]과 같이 한국어 화자 사이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외래어에까지 비중을 더욱 더 많이 둔다는 비판이 있다. 심지어 조르즈 오리크와 같이 한국어 화자 사이에서 극히 알려지지 않은 외국인 인명[94]을 다수 수록했다는 지적도 있었다.[95]

전산화의 어려움[편집]
한중일 문자로 나타낸 위키데이터와 위키베이스 로고. (왼쪽부터 한글, 가타카나, 중국어 간체)

로마자키릴 문자 기준으로 만들어진 전산 체계에서는 수십 자 이내로 글자를 표현하면 문장을 지장 없이 표현 가능한 문자들이다. 허나 이와 달리, 한자 및 한중일의 문자의 체계 특성 상 수없이 많은 글리프를 통해 구현해야했기 때문에 이 문자들은 전산화문자 인코딩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글의 경우 옛한글을 포함하면 1,638,750가지의 조합이 나타난다. 워크래프트 III: 리포지드[96], 데스티니 가디언즈[97]와 같은 게임의 경우, 한국어 및 중국어판에서 문자 인코딩 오류로 난항을 겪은 바 있으며, CJK라는 공통 문자 집합이 있지만, 각각 인코딩은 국가별로 다르게 개발되었기 때문에 서로 호환되지 않아 문자 깨짐 현상이 일어난다. 이후 유니코드의 도입 및 글자당 2바이트를 할당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위키미디어 재단위키백과 서비스 초창기 당시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순으로 서비스가 시작하였지만, 그 당시 유니코드의 도입이 되어 있지 않아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중국어 위키백과한자를 지원하지 않았으며, 일본어 위키백과도 한자(신자체) 및 가나 문자, 한국어 위키백과 역시 한글이 지원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영어 음절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임시적으로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고,[98] 중국어 위키백과는 첫 서비스가 시작되었던 2001년 5월에 한자가 지원되지 않아 백과사전적인 내용을 작성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구판 미디어위키 엔진이 가변 너비 인코딩CJK 문자를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국어 위키백과도 마찬가지로 한글 처리에 문제가 있었고 글을 올릴 수도 없었다. 한국어와 중국어 위키백과는 유니코드가 도입된 신판 미디어위키가 도입된 2002년 10월 이후 본격적으로 문서 작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중일의 인터넷 문자 인코딩 역시 매우 달라서, 이 세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작성된 텍스트 문서, 웹 페이지 등을 열람할 때 문자 깨짐 현상이 나타났다. 한중일 모두 가변 너비 인코딩 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가변 너비 인코딩은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의 인코딩을 위해서 만들어졌었다. 세 지역의 문자 모두 256자를 초과하는 규모가 큰 문자 집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뷁어'라는 단어가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다. 이것은 '한글로 바뀌었으나, 아무 뜻이 없는 음절들이 난립하여 해괴하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EUC-KR과 CP949 방식의 인코딩 형식을 사용하고 있었고, 일본은 Shift_JIS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둘의 문자 인코딩이 호환되지 않아, 한글로 적혀 있으나 어디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음절들이 난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어 화자들은 이 현상을 '뷁어'라고 불렀다. 유니코드의 등장 및 UTF-8의 보급으로 이런 현상은 잦아들었다.

문학[편집]

시가[편집]

한국의 대표 정형시는 시조(時調)라고 볼 수 있다. 정형시임에도 불구하고 시조의 음절 수를 지킨 시는 많지 않았으며 글자 수가 약 45자 정도로 대체적으로 정해져 있기는 하나 엄격하게는 규정되지 않은 것이 시조의 한 가지 특징이 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를 미루어보아 한국은 항상 규칙을 지키는 것 보다는 시상의 자연스러움을 더 중시하며 약간의 가감을 더 중시한 것으로 판단했다.[14]

중국의 대표 정형시는 대련(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Zh/data/zh' not found.)이라고 볼 수 있다.(对联 참조) 대련은 두 구로 이루어진 시를 뜻하며, 각 줄은 다음 줄과 같은 수의 한자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허나 대련의 글자 수 제한은 없으며, 현대 이전의 가장 긴 시는 청나라 말기, 1904년에 만들어진 종운방(鍾雲舫)의 <의제강진임강누연>(擬題江津臨江樓聯)으로 한 구가 806자, 전체 1612자로 되어있으며 현대 이후의 가장 긴 시는 조효광(趙曉光)의 〈愛我中華〉(→사랑하는 나의 중화)로 한 구에 33333자, 총 66666자로 이루어진 대련으로 알려져 있다.[14]

일본의 대표 정형시는 하이쿠(틀:Ruby/styles.css 문서에 내용이 없습니다.俳句 (はいく))라고 볼 수 있다. 하이쿠는 5-7-5 음절, 총 17음절로 이루어 진 시가를 말한다. 그러나 그러나 하이쿠를 형성하는 규칙은 몹시 정형화되어있고 철저하다. 하이쿠를 짓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위 형태의 17음절에서 벗어나면 안 되며, 키고(季語), 키레지(切れ字) 등의 규칙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14]

전통 음악[편집]

예절[편집]

인사 예절[편집]

한국, 중국, 일본의 인사 예절 역시 서로 모두 다른 요소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다양하게 이름 불려지는 인사가 있다. 그 중에서도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방법을 '오지기'(御辭儀) 라고 한다. 이 때 다른 국가에서처럼 몸을 앞으로 굽히는 인사는 손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데, 허벅지에 손을 두거나 차렷 자세에서 팔을 움직이지 않고 몸을 앞으로 굽힌다. '사이케이레이'(最敬禮)는 '가장 공손한 경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시선은 몸에서 1m 정도 떨어진 바닥으로 향하고 등은 꼿꼿하게 편다. 보통 중요한 일을 부탁할 때나, 사죄를 할때 사용된다. 면접과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이 같은 인사를 사용하기도 한다. 사이케이레이를 할 때는 두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아야 한다.

한국은 평상시에 사용하는 인사법을 입례(立禮)라고 하는데, 입례에서는 손이 몸의 중간에 위치한다. 먼저 배꼽 부분에 손을 모으고 몸을 굽힌다. 이 때 남성은 왼손이 앞에, 여성은 오른손이 앞에 있어야 한다. 본래 이는 친숙한 존장자를 만났을 때 하는 인사법이다. 장례에서는 반대로 손을 잡고 행동한다. 그러나 제사는 흉사가 아니므로 평상시대로 해야 한다. 본래 공수를 하며 인사를 해야 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개화기 이후에 생겨난 최근의 풍조로 보고 있다.[99]

중국은 손이 가장 높게 위치하며, 인사 예절이 3국 중 가장 이질적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자신의 가슴에 손을 모아 고개를 조금 앞으로 숙인다. 이것을 '공수'라고 한다.[100] 남자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만들고, 오른손을 왼쪽 손바닥으로 감싸 가슴 높이에 올려서 상대방에 대한 공경을 표한다. 이 때 여자는 오른쪽을 공손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주먹의 위치를 남성과 반대로 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왼손을 보이는 것은 공경을, 오른손을 보이는 것은 공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01]

일본에서는 2015년 전후로 인사 예절이 한국식 인사 예절처럼 변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논란이 되었다. 2016년 4월 경 일본 맥도날드 광고에서 한국식 인사를 하는 직원의 모습이 삽입되어 논란이 되었다.[102][103][104]

중국에서는 악수를 하게 되었는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악수가 지양되고 공수 인사가 부활하는 경향을 보였다.[105][106]

한중일 3국 모두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가장 공손한 인사는 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행위가 잊혀져가고 있어, 공수 인사가 보편화되어가고 있다.[107] 일본에서는 절하는 행위를 보통 사죄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도게자(土下座)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도게자는 존경하는 상대에게 하거나 깊이 사죄할 때 사용되는 자세이다.[108]

식사 예절[편집]

한국은 고개를 숙여 밥그릇에 입을 가까이 대고 먹는 반면, 중국과[109] 일본은 밥그릇을 입에 가져가 가까이에 대고 먹는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국의 식습관과 같이 먹는 것을 "거지가 구걸하는 것 같다", "동물이 밥을 먹는다" 로 생각하여 예의 없는 행동으로 여긴다. 중국에서는 "개나 돼지가 먹는 것" 으로 느끼며,[110][55] 일본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개가 먹는 행위"(ja:犬食い)라고 부른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식습관처럼 밥을 먹는 행위를 "거지가 밥을 먹는 것과 같다" 라고 하여 예의 없는 행동으로 간주하고 기피한다.[111]한국에서 예절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어떻게 생겼냐고 한국인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이 양반 문화에서 내려져 온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 역시 초기에는 밥그릇을 밥상 위에 두고 먹는 것이 예의로 취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는데, 중국에서의 식습관 변화, 주류 쌀 품종의 변화 등이 있다. 일본의 학자 슈 탓세이(ja:周達生)는 중국인들이 젓가락만 사용하게 된 것은 14세기 이후 명나라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였다.[55]

그릇을 들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은 한국의 석재 가공 및 철 제련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석재와 철은 나무보다 열전도율이 높은 소재인데, 이를 사용해 만든 그릇에 뜨거운 음식을 담으면 들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석재와 철은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손 위에 올려 먹는 것도 적합하지 않다. 실제로 한국의 뚝배기과 같은 그릇은 열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돌솥과 같이 손으로 들어올리기 힘든 구조의 그릇 형태도 발견된다. 또한 한국은 나무 그릇보다는 놋그릇과 같은 금속제 그릇을 주로 사용하였다. 한중일 모두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우공양'이라는 개념이

한중일 식사예절 비교
비교 한국 중국 일본
밥그릇을 들어 올려 먹는 것 width=20% 틀:No
구걸하는 사람들이 주로 밥을 들고 먹기에, 천박해 보인다는 이유에서 금기가 되었다. 그 대신 밥그릇의 밥을 국그릇에 옮겨 말아 먹는 방식이 발달했으며, 몸을 숙이고 국그릇을 입 가까이 대고 숟가락으로 국에 만 밥을 떠 먹는다.[112]
예의
밥그릇을 들어올리지 않고 먹으면, 돼지가 먹는 것 같이 보이기에 예의에 어긋나게 된다.[113]
예의
밥그릇을 들어올리지 않고 먹으면, 개가 먹는 것 같이 보이기에 예의에 어긋나게 된다.
젓가락의 방향 틀:Okay 틀:Okay 틀:No
젓가락을 가로로 놓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다. [114] 일본의 젓가락은 끝이 뾰족하며, 세로로 놓는 것은 뾰족한 물건을 상대방에게 겨누는 것이 되어 예의가 아니게 된다.
식사 시 소음 틀:No
한국 전쟁 이전까지는, 음식을 먹을 때 국물을 마시는 소리, 씹는 소리, 열무를 베어무는 소리 등 대부분의 소리를 내면 안 되었다.[115] 그러나 현대에는 사회 전반적인 소외 현상이 나타나, 식사시간 이외에는 친한 사람과 대화할 시간이 없으므로 최대한 대화하려고 하는 양상을 보인다. 다른 음식에서 나는 소음에 대해서도 변화가 일고 있는데, 국수와 같은 음식에서도 소리내어 먹어야 하는가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쟁이 일곤 한다.[116][117][118][119]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소리를 내면서 먹는 것은 음식물이나 국물이 튀는 등 비위생적인 식사 방법으로 취급되었다.[120][121]
틀:No
특히 식사 중에 젓가락으로 밥그릇을 두드리며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 이는 예의 없는 행동일 뿐 아니라, '먹을 밥이 없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109]
틀:Partial
일본에서는 국수 종류 음식을 먹을 때 '후루룩'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을 "맛있게 먹고 있다"라고 받아들인다. 또한 녹차를 마실 때, 마지막 모금은 소리를 내며 마신다. 그러나 그 이외의 음식에서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예의로 받아들여진다.
음식 남김 여부 틀:Partial
아랫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어야 하는 상물림 체계에서는 음식을 적당히 먹고 내려주는 것이 예의로 받아들여진다. 음식을 전부 먹으면 "선비임에도 탐식을 하는 것"으로 비쳐져 예의가 아니게 된다.[122] 그러나 음식을 남기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예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예의
중국인에게 있어서는 음식을 모두 먹지 않고 남기는 것이 칭찬과 같다.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면, 손님으로서 '음식이 부족했다'는 의미로 들어 당혹감을 주거나, 도발로 느낄 수 있다.[123] 그러나 환경 오염과 관련한 문제가 알려지게 되면서, 중국 사회에서도 음식을 남기지 않는 문화로 변화하고 있다.[124]
틀:No
국물이 있는 음식의 경우, 국물까지 모두 먹어야 예의가 된다.
첨잔 여부 틀:No
술이 술잔에 다 비었을 때 따라주는 것을 예의로 여긴다.[125]
예의
첨잔을 계속 하여 술잔이 비지 않도록 한다.[126][125][127][123]
예의
첨잔을 계속 하여 술잔이 비지 않도록 한다.[128][125][127]

그러나 공통적인 식사 예절은 다음과 같다.

  • 젓가락을 음식 위에 세로로 꽂아넣는 것은 유교, 불교 등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의 영향으로, 제사 예법을 밥상에서 하는 행위이므로 부정한 것으로 여겨 금기시된다.
  • 젓가락을 음식 사이에 넣고 오랫동안 뒤적이는 것은 비위생적으로 여겨진다.
  • 생선을 뒤집는 것은 배가 뒤집어지는 것을 연상시켜 금기시된다.[129][109][123]
  • 국수의 면을 가위로 자르는 것은 옳지 않다. [129][123]

전통놀이[편집]

같은 형식의 보드 게임이지만, 각 국이 다른 형식으로 발달시킨 각자의 보드게임이 발달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장기가, 중국에는 샹치가, 일본에는 쇼기가 만들어졌다. 이 세가지의 전통 보드게임은 한중일 모두가 지금도 즐기고 있는 보드게임이다. 각각의 보드 게임은 각자 다른 룰을 가지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적의 왕을 잡으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스포츠[편집]

전통 스포츠[편집]

무예[편집]
바둑[편집]

한중일 3국에서 가장 많이 즐기는 보드 게임은 바둑이라고 볼 수 있다. 한중일 3국에서 열리는 바둑 기전들이 이에 해당된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개최된 바둑 대회는 다음과 같다.

이름 연도 주최 유형 비고
진로배 SBS 세계 바둑 최강전 1992년~1997년 대한민국 SBS 단체기전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최강전 1992년~1997년 대한민국 한국기원 단체기전
금룡성배 세계바둑단체전 2002년~2011년 중화인민공화국 광둥바둑문화촉진회
중화인민공화국 광둥 동호기원
중화인민공화국 광저우시 바둑 협회
제한기전 타이완 대만 참가
세계 시니어 바둑대회 2017년~2019년 중화인민공화국 중국바둑협회 제한기전
한중일 명인전 2010년~2018년 중화인민공화국 중국바둑협회 제한기전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 1989년~2019년 대한민국 KBS
중화인민공화국 CCTV
일본 NHK
제한기전
월드바둑챔피언십 2017년~2019년 일본 일본기원 제한기전 일본 AI 딥젠고 출전
2018년 타이완 대만 참가
신사배 국제바둑대회 1995년 제한기전
세계페어바둑 최강위전 2017년~2019년 일본 일본페어바둑협회
유엔 세계페어바둑협회
제한기전 타이완 대만 참가
바이링배 2012년~201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제위기연맹
중화인민공화국 구이저우성
종합기전
천부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 2018년 중화인민공화국 국제위기연맹
중화인민공화국 구이저우성
종합기전
신아오배 세계바둑오픈 2016년~2017년 중화인민공화국 국제위기연맹
중화인민공화국 중국기원
종합기전
BC카드배 월드 바둑 챔피언십 2009년~2012년 대한민국 한국기원 종합기전 타이완 대만 참가
동양증권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1988년~1998년 대한민국 서울경제 종합기전 타이완 대만미국 미국, 유럽 유럽 참가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1988년~2011년 일본 요미우리 신문
일본 일본기원
일본 간사이 기원
종합기전
도요타덴소배 2002년~2009년 일본 일본기원 종합기전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1999년~ 대한민국 한국기원 단체기전
한중일 3국 신예대항전 2016년 중화인민공화국 난창시
명월산배 한중일 클래식 2014년~2016년 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오카게배 국제신예바둑대항전 2014년~2019년 일본 일본기원 단체기전 타이완 대만 참가
톈타이산 세계 여자 바둑 단체 대항전 2012년~2019년 중화인민공화국 톈타이현 단체기전 타이완 대만 참가
호반배 세계여자바둑패왕전 2022년 대한민국 서울신문 종합기전
황룡사배 2011년~2019년 중화인민공화국 장옌구 종합기전 타이완 대만 참가
한중일 녜웨이핑배 바둑마스터스 2019년~2022년 중화인민공화국 중국바둑협회
중화인민공화국 청두시
제한기전
한중일 용성전 2019년 일본 일본기원 제한기전
국수산맥 국제바둑대회 2014년~ 대한민국 강진군
대한민국 영암군
대한민국 신안군
대한민국 전라남도
제한기전 타이완 대만 참가
CCTV 하세배 한중일 바둑쟁패전 2013년~2020년 중화인민공화국 CCTV 제한기전
LG배 세계기왕전 1996년~ 대한민국 조선일보
대한민국 한국기원
종합기전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마스터스 1996년~ 대한민국 중앙일보
대한민국 KBS
종합기전
몽백합배 세계 바둑 오픈전 2003년~ 중국 중국바둑협회
유엔 국제 바둑 연맹
종합기전
응씨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1988년~ 타이완 잉창치 종합기전

현대 스포츠[편집]

한중일 3국은 전반적으로 e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한중일 3국이 두각을 보이는 게임 종목은 배틀그라운드,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등의 팀 게임 혹은 온라인 게임이다. 2020년대부터는 한중일 e스포츠 대회를 매 년 개최하여, 3국의 e스포츠 국가대표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풀뿌리부터 국가대표 선발까지 건강한 이스포츠 생태계 구축과, 동아시아권의 글로벌 e스포츠 주도권 확보, 이스포츠 대회의 새로운 국제표준을 제시하고, 게임문화축제를 통한 세대간 유대감 강화"를 강조했다. 이는 e스포츠 생태계를 형성하고, 한중일간 우호를 증진하며 더 나아가 e스포츠 산업의 글로벌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기획되었다.[130]

2022년 5월에는 '한중일 버츄얼 마라톤 대회'가 개최되었다.[131]

미신[편집]

수비학[편집]

한중일 모두에서 통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수비학 미신으로는 4자 금기가 있다. 이는 한자 문화권 전반에서 통용되는 미신으로, 숫자 4를 읽는 방식이 '죽음'을 뜻하는 한자의 발음과 같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비슷한 발음이 나는 두 글자를 이어 연상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해음이 있다.

선물 미신[편집]

중국과 일본에서는 선물에 대한 미신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는 칼을 선물하면 앞으로의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거나, 관계를 끊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선물에 대한 미신은 중국에 특히 많이 남아 있는데, 해음의 영향으로 수많은 미신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괘종시계()를 선물하는 것은 '끝나다'를 의미하는 '終'과 같은 발음이 나기에 노인에게 선물하는 것은 예의없는 행위로 간주된다.

문화콘텐츠[편집]

제 8회 한중일 문화장관회의 (2016년 8월 27일)

한중일 국가는 역사적 및 정치적 문제가 남아 있지만, 민간 교류는 몹시 활성화 되어있다. 만화, 드라마, 비디오 게임 등의 대중문화는 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영화[편집]

한중일 세 국가가 모두 참여한 영화는 《묵공》이다.

드라마[편집]

한중일 국가 모두에서 드라마화 된 작품인《꽃보다 남자》는 한중일의 공통된 욕구를 나타내는 드라마로 분석하였다. 한중일 뿐만 아니라 대만 역시 신자유주의를 채택한 후 재벌과 같은 사회 문제가 나타났는데, 21세기 젊은 여성으로서의 소망을 대리만족 시켜 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여유 및 경제력에 대한 선망을 그려낸 작품이기에 동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면서도 "고귀한 가치의 중요성도 포기할 수 없다"는 양가적 태도가 동북아시아 4개국의 수용자들에게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꽃보다 남자》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여성 주인공과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남성 주인공 네 명의 만남 구도가 나타나는데, 이 때 소비자본주의에 기반한 소비욕망을 허구적인 세계에서나마 충족시켜주면서도, 동시에 소비주의적인 가치에만 매몰되지 않겠다는 이상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동북아시아 국가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가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순수한 사랑의 힘을 신뢰하고 싶어하고 경제적 강자에 대해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삶의 태도를 가진 꿋꿋한 소녀의 모습을 주제로 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분석했다.[132]

한중일 중 두 나라만이 합작을 시도한 드라마는 있어왔지만, 세 나라 모두가 제작에 참여하는 드라마는 없었으나 스트레인저 6와 같은 한중일 합작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현대 음악 및 대중 음악[편집]

한중일은 정치외교적으로는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음악 면에서는 민간 교류 부분에서 가장 큰 교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2020년대 틱톡 등의 챌린지를 통해 수많은 음악들이 공유되는 것 역시 존재한다.

일본의 음악 그룹 WORLD ORDER는 한중일의 평화를 바라는 내용의 뮤직비디오를 선보인 적 있다.[133]

만화[편집]

한국의 경우, 전통적으로 학습 만화 장르가 가장 인기 있다.[134]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강한 나라 중 하나이며, 이에 따른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135] 이 학습만화는 중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중동 등 아시아권에도 큰 인기를 끌었다.[136][137][138][139][140][141] 그러나 학습 만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142][143]

애니메이션[편집]

한중일 중 애니메이션 산업으로 가장 유명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스튜디오 지브리, 가이낙스, 가도카와 등 수많은 애니메이션 회사가 존재하며, 인기 있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특히 일본의 오타쿠 문화와 애니메이션을 상징하는 작품이다.[144][145]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특히 고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 많다.[146] 그러나 아동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다. 일본의 아동 대상 애니메이션은 《내 친구 호비》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한국 애니메이션 역시 전 세계에 수출되는 등 인기가 많지만, 연령대는 대부분 어린이 및 초등 저학년들을 대상으로 한다. 주로 학습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며, 3D 그래픽 애니메이션 기법이 주로 사용된다. 더욱 저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들은 영유아들이 집중하고 볼 수 있거나 좋아할 수 있는 연출, 기법들을 사용하여 호평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은 아이코닉스의 《뽀롱뽀롱 뽀로로》 및 《꼬마버스 타요》가 있으며, 이 두 애니메이션 모두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휩쓸었다.[147] 한국에서의 학습만화의 인기에 따라 기존의 발간되었던 학습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브레드 이발소》와 같은 경우는 네모바지 스폰지밥과 비슷하게 블랙 코미디 성향을 가미하여 고연령층과 저연령층 모두를 대상으로 하기도 했다. 《브레드 이발소》 역시 학습 애니메이션 열풍에 힘입어 후속작으로 《브레드와 윌크의 세계여행》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되었다. 한국의 학습 애니메이션은 언어와 수학, 과학에 관한 학습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안전이나 세계사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기도 한다. 202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인기가 많지만,[148] 교육이나 정서 지향보다 엔터테인먼트나 미디어 매체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러한 애니메이션으로는 《캐치! 티니핑》이 있다.[149] 한국의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루피'를 이용한 밈 '잔망 루피'는 중국에도 수출되어 청년층 세대에 큰 공감을 안겨주기도 하였다.[150] 핑크퐁의 '아기 상어'는 2020년대 유튜브의 최고 인기 조회수를 차지하기도 하였다.[151][152]

중국은 최강무장전 삼국연의 등의 작품으로 애니메이션 산업에 뛰어들었다.

2019년 개봉된 《안녕, 티라노: 영원히, 함께》는 한중일 국가가 모두 참여한 애니메이션이며[153] 2016년 '한중일 국제 애니메이션 엑스포'가 열리기도 하였다.[154]

한중일의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것은 묘사의 차이이다. 일본은 프레임 수가 낮으며 원본 언어에 따라 입 모양을 맞추지 않지만 한국은 프레임 수가 조금 더 높으며 입 모양을 맞춘다. 중국은 가장 프레임 수가 높으며 머리카락과 같은 움직임의 묘사가 가장 두드러진다.

게임[편집]

[155]

한중일 중 게임 산업의 전통 강자로 일본이 있다. 닌텐도, 세가, 코나미 등의 다양한 게임 회사가 존재하며 많은 프랜차이즈를 생산하기도 했다. 일본의 모에 그림체 캐릭터들은 한국과 중국에 큰 영향을 끼친다. 미호요의 《원신》이나 넥슨의 《블루 아카이브》는 일본의 모에 그림체를 참고하여 캐릭터를 디자인하였다.

2010년대 중반은 중국의 게임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던 시대이다. 그러나 초창기 중국은 모바일 게임 허위 광고로 악명을 떨쳤으며, 바이럴 마케팅과 다름 없는 광고를 하여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였다.[156] 더불어 다른 국가의 게임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157] 미호요의 《붕괴》, 넷이즈의 《제5인격》 등의 게임들을 시작으로 많은 게임들이 큰 인기를 끌었으며, 다른 프랜차이즈들과 콜라보 이벤트를 계속하여 진행하였다.[158][159][160][161] 두 게임 모두 글로벌 서버에서 1억 이상의 유저를 거느리는 등 큰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으며[162] 이후 《원신》을 통해 도약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 게임은 미국이나 일본의 게임, 캐릭터 디자인들을 표절하였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제5인격》은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의 게임성과 《코렐라인: 비밀의 문》의 캐릭터 디자인을,[163]원신》의 경우 일본 닌텐도사의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164][165]

한국의 경우는 게임 개발에 대한 이미지보다는 게임 콘텐츠 소비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며, 특히 '프로게이머'라는 이미지가 잡혀 있다. 이러한 인상은 다양한 게임 대회에서 한국 팀이 많은 상을 수상함으로서 더욱 더 굳혀졌으며 오버워치 등 수많은 게임들에 한국인 국적의 캐릭터들이 게임이나 해킹에 관련된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166][167][168] 게임 개발에 대한 것은 《리니지》 등의 게임으로 수익성은 높지만 게임성은 부족한 사행성 작품들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으며[169] 실제로 중국 게임에 지위가 밀릴 정도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170][171][172][173][174] 1990년대의 한국 게임들은 《임진록》 등 독창적이거나 한국의 고유 문화를 녹여내는 등의 시도를 했으나, 2000년대 초반에는 《리니지》의 영향 및 《메이플스토리》처럼 수익성을 강조한 게임 모델을 가진 게임들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더불어, 2000년대의 게임들은 유명한 일본 게임들을 표절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예를 들어, 넥슨의 《크레이지 파크》 프랜차이즈 중 《크레이지 아케이드》의 경우 《봄버맨》을, 《크레이지레이싱 카트라이더》는 《마리오 카트》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더불어 인디 게임에 대한 규제와 게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 탓에, 2010년대는 사실상 암흑기를 거친 것과 같다. 2020년대부터 《P의 거짓》, 《블루 아카이브》, 《인조이》 등의 새로운 시도를 통해, 게임콘텐츠 산업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2020년대의 몇몇 게임들 역시 중국 게임들과 같이, 일본 게임들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가져왔다. 네오위즈의 《P의 거짓》은 프롬소프트웨어의 《블러드본》을,[175][176][177] 인디 게임에서도 사이버펑크조선 시대를 접목시킨 게임 《산나비》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한국 게임이 전통 강국이었던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178]

사회[편집]

경제[편집]

한국, 중국, 일본은 지적 재산권 등 다양한 경제 분야에서, 세계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많다.

농업[편집]

차 생산[편집]

한중일 3국은 녹차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며 각 나라의 생산량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중일 각 국가는 녹차를 우려내 마시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 아래는 각 국가별 녹차를 가공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정리하였다.[179]

  • 중국의 기 중국에서는 녹차를 만들 때 찻잎을 솥에 덖어 발효를 막는 부초법(釜炒法)을 이용하는데, 다른 이름으로 덖음차라고 한다. 이렇게 만든 차는 찻잎의 풋내가 적고 구수한 맛이 난다. 이밖에도 중국의 녹차는 찻잎을 건조시킬 때 어떤 방법을 택하는가에 따라 크게 네 종류로 나뉜다. 솥에서 덖음법으로 건조시키면 초청(炒靑)녹차, 햇볕에 쬐어 건조시키면 쇄청(曬靑)녹차, 홍건기계를 사용하거나 밀폐된 방에 불을 때어 건조시키면 홍청(烘靑)녹차, 열증기 살청 방식으로 건조시키면 증청(蒸靑)녹차가 된다.
  • 일본의 기 일본의 녹차는 찻잎을 증기로 쪄서 익히는 증제법(蒸製法)을 주로 사용한다. 증제법으로 만든 차는 덖음법으로 만든 차보다 빛깔이 곱고 맛이 산뜻하다. 증제차는 찌는 방식과 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전차, 옥로차, 번차, 연차, 호우지차 등으로 나뉜다.
  • 한국의 기 한국에서는 중국처럼 솥에 덖는 덖음차와 일본처럼 증기로 찌는 증제차를 모두 생산하고 있지만, 덖음차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전통 방식의 덖음법은 주로 사찰의 스님들을 통해 전수되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찻잎을 뜨거운 물에 데친 뒤 식혀서 물기를 제거하고, 뜨거운 방에서 말리거나 여러 번 덖어 완성하는 자비법(煮沸法)과, 달군 차솥에 한 종지의 물과 찻잎을 넣고 뚜껑을 닫았다가 열어 찻잎을 뒤집어가며 익힌 다음, 뜨거운 방에 창호지를 깔고 찻잎을 널어 식히고 다시 여러 번 덖어 완성하는 반증반부법(半蒸半釜法)으로도 녹차를 만든다.

조선업[편집]

한중일 3국의 조선 기술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발달되어 있다.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중일 3국의 조선업을 모두 합친다면 전 세계 점유율이 97%에 달한다.

관광[편집]

일본 나리타 공항에 있는 환영 안내문.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 중국어로 환영 인사가 함께 적혀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은 서로가 가장 많이 관광을 하는 나라로 꼽힌다. 한국에서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관광객과 일본에서 한국이나 중국으로 오는 관광객, 중국에서 한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관광객이 전체 관광객 수 중에서 가장 많다.

정치[편집]

한중일은 정치적으로 몹시 복잡하며,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2023년부터 대한민국 외교부는 "한중일"을 "한일중"이라고 표현하는 경향을 보인다.[180][181][182][183][184]

국제 관계[편집]

한중일 모두가 정치적으로는 우호적이지 않은 관계에 있지만, 협력을 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한중일 3개국은 매년 연례적으로 개최하는 국가 정상급 회의인 한중일 정상회의에 참가하고 있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고 경제 협력 및 관계 개선, 재난 대책 등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2023년 9월에는 한중일 문화장관이 모여 3국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하는 '전주 선언문'에 서명했다. 전주 선언문은 한중일 3국은 젊은 세대 간 문화교류와 지역 간 교류를 강화하고, 장애 유무에 상관없는 공정한 문화 접근 기회 보장 및 국제적 과제의 문화적 해결을 위해 협력하며,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 등 문화기관 간 연계망을 강화하고, 문화콘텐츠 산업 협력, 국제스포츠대회를 계기로 하는 문화예술 교류 행사 진행 등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다.[185][186][187]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편집]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TCS)이 있다.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지속적 평화, 공동번영, 공통문화 비전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정부 간 국제기구이다.

한중일 3국이 협력했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따오기를 복원한 사업이 있다. 따오기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던 시점, 중국에서 야생 따오기 7마리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발견한 중국과 일본 간의 따오기 복원 및 번식 사업이 진행되었다. 복원한 따오기는 한국과 일본에 전파하기 위한 한중일 공동의 노력이 있었으며, 그 결과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의 마스코트로 따오기가 선정되었다.[188]

동중국해 EEZ 분쟁[편집]

동중국해 EEZ 분쟁은 동중국해배타적 경제 수역 획정과 관련한 한국, 중국, 대만, 일본의 국경선 획정 분쟁이다.

국가인지도[편집]

한중일은 과거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왜곡되어 묘사된 대표적인 나라들 중 하나다. 중국과 일본은 긍정적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환상과 신비)이 주로 형성된 반면, 한국은 부정적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야만과 미개)이 주로 나타났다. 중국은 소림사 등의 매체의 영향으로 쿵푸와 같은 무술과 관련된 이미지나 "은둔하는 현자", "깨달음과 지혜의 땅" 등의 이미지가 확립되었으며, 일본은 사이버펑크나 서구를 위협할 수 있는 경제 대국, 사무라이닌자를 통한 무사의 이미지가 있지만 한국은 과거 선교사들의 기록 중 '지저분한 거리' 등의 불결한 것을 묘사한 부터 6.25 전쟁의 영향으로 2000년대에도 종종 가난하고 낙후된 이미지로 그려졌으며, 아웃브레이크, 월드워Z 등의 매체에서 좀비 바이러스나 전염병 등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질병의 발원지로 주로 나타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189][190][191]하지만 시간이 지나 한국은 빠른 경제 발전과 고도의 과학 기술을 홍보하였으며, 그에 따라 일본과 같이 사이버펑크 및 편의성을 중심으로 둔 이미지를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의 조회수[편집]

건국대학교 기술경영학과와 동덕여자대학교 정보통계학과 이영환, 전희주, 송영화는 논문 《영어 위키피디아 페이지뷰를 통한 한중일 국가 인지도 비교》 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52]

한중일 국가인지도 조사 (2008년 7월~2014년 6월) 단위: 10,000
주제 한국 중국 일본 총합
키워드
정치 14,629 7,546 14,609 36,784
사회 23,577 76,865 63,364 163,806
문화 75,865 27,370 64,186 167,421
경제 18,956 49,732 51,629 120,317
세부 분야 - 정치
국가 지도자 661 1.0 214 875
군사 5,109 2,195 5,858 13,613
정부 266 1,433 664 2,363
정부 체제 266 624 129 1,019
외교 관계 5,460 2,540 6,629 14,629
정당과 정치인 2,867 752 1,058 4,667
세부 분야 - 사회
지리 7,925 39,582 22,167 69,673
교육 1,126 5,984 657 7,767
역사 9,043 10,909 17,190 37,142
언어 1,581 2,864 5,522 9,967
종교 826 6,505 6,698 14,029
사람 1,191 2,366 2,964 6,521
세대 119 1,388 3,050 4,556
사건 사고 706 1,842 1,633 4,181
사회 제도 307 4,721 1,188 6,216
미디어매체 650 549 1,839 3,038
세부 분야 - 문화
미술 2,865 8,414 26,837 38,116
음악 35,917 145 5,794 41,856
영화 7,514 236 3,656 11,405
스포츠 14,266 1,202 15,204 30,672
음식 3,352 15,104 8,346 26,802
TV 프로그램 10,430 11 1,662 12,102
축제 745 179 760 1,684
문화재 584 1,927 1,637 4,147
세부 분야 - 경제
산업 8,634 3,817 15,453 27,903
복지 9 8,341 236 8,586
재정 400 777 271 1,448
기반시설 1,622 3,245 3,584 8,451
과학 186 15,944 1,830 17,960
기술 2,915 16,881 4,069 23,866
제품 5,190 727 26,186 32,104

해당 논문에서 한중일의 영어 위키백과를 통한 국가인지도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아래 다섯가지 모두 국제 인지도에서 유의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분야 면에서 한국은 문화 분야가 가장 강했으며 다른 두 국가보다 더 높은 모습을 보여줬다. 정치 면에서 일본과 근소한 차이로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며 일본은 경제 분야에서 가장 두각을 보였다. 중국은 사회 분야에서 가장 두각을 보였다.

정치적 면에서 한국은 지도자와 정당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이 중에서 가장 낮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은 정부와 정부 체제였다. 중국은 정부와 정치 체제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반면 정당에서 낮은 수준의 조회수를 보였으며 국가 지도자 면에서 1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해 전체 분야에서 가장 낮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일본은 군사 관련 문서와 외교 관계 문서가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정부 체제 관련 문서가 3국 통틀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면에서 한국은 대체적으로 모든 면에서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역사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보여줬으며 이는 6.25 전쟁의 영향이 크다. 중국은 지리 및 사회 제도가, 일본은 언어와 세대, 역사 및 매체와 종교에서 가장 높은 관련성을 보인다.

문화적 면에서 한국은 음악과 TV, 영화에서 가장 큰 강점으로 인식된 것으로 나타났다. 음악의 경우는 한국의 팝송등으로 인해 알려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포츠에서도 강한 면을 보이긴 하지만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관련성을 보인다. 또 음식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요리 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나라는 중국이었다. 중국의 요리는 해외에서 '요리'로 가장 잘 알려진 나라로 자리잡아왔으며 이것이 위키백과 조회수에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은 또 문화재에서도 큰 관련성을 보이고 있지만, 음악과 영화, 스포츠 면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미술에서 가장 큰 두각을 나타냈으며 상대적으로 축제와 스포츠와의 관련성이 높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과 일본의 전통 축제인 마쓰리와 연관되어있다.

경제 면에서 한국은 전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보이지만 산업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고, 복지 면에서 가장 낮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약 9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이것은 모든 분야를 통틀어 중국의 국가 지도자(1.0)를 제외하고 가장 낮은 수치이다. 특히 인프라에서 나머지 두 국가에 비해 절반 정도의 조회수를 기록하여 인프라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국은 복지과학, 기술이 강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제품 면에서 가장 낮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반면 일본은 제품에서 가장 큰 조회수를 기록했고 경제 면의 모든 분야를 통틀어서 가장 높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이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국가) 재정으로 나타났다.

기타[편집]

한중일의 기타 개념 비교
비교 한국 한국 중국 중국 일본 일본
'한 군데도 빠짐없이' 방방곡곡(坊坊曲曲) 오호사해(五湖四海)
산남해북
진진포포(津津浦浦)[192]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자세 동도서기(東道西機) 중체서용(中體西用) 화혼양재(和魂洋材)[193][194]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내용주
  1. 국가상으로는 한국의 군정기6.25 전쟁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 한국 문화에서 분화되지 않은 한민족으로 분류되기에 '한국'이라는 명칭으로 두 나라가 통합된다.
  2. 국가상으로는 국공내전의 영향 이래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두 나라가 하나의 중국, 일국양제 원칙에 합의하였다. 둘 중 어느측이 합법 정부인지는 각자의 해석에 맡긴다는 단서를 달았으나, 문화적으로는 '중국'이라는 명칭으로 두 나라가 통합된다. 또한, '중국'이라고 지칭되는 지역은 중화권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이는 마카오, 홍콩 등도 포함하는 지역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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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 어쩌다 어른》 제38회, "이방인의 마음,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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