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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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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효자비

형제효자비(兄弟孝子碑)는 조선시대 안산 지역에서 가장 큰 안동김씨 집성촌[1]의 효자 김동려(金東礪, 1789년~1840년, 자 명녀明汝)와 김동은(金東殷, 1796년~1857년, 자 明益명익) 형제를 기리는 비석이다. 두 형제는 효성이 지극하여 동려가 살아 있을 때부터 사람들의 공의가 일제히 일어나고 유자들과 향당의 장첩이 쌓여 책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 1900년 3월 일 안산군, 조선)에 있다.[2] 형제효자비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다.


안산군읍지

효자 김동려 김동은 형제[편집]

[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 1900년) ][편집]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 1900년)기록[3]에서 김동려 김동은 형제 기록은 아래와 같다.

김동려 동은 형제 행적

나라에 효자를 표창하는 법이 있는 것은 단지 효자만을 홀로 위한 것이 아니라 불효자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효라고 하는 것은 비록 순임금이나 증자라 하더라도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진실로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을 일삼음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효도를 능히 한 사람은 적고 능히 하지 못한 사람은 많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를 얻으면 그 퇴폐한 풍속에서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마땅히 남이 모르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부터 먼저 표창해야 할 것이다.

안산 서쪽에 효자 김동려, 동은 형제가 있으니 대개 궁벽한 시골 사람이다. 어찌 더욱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려는 어려서부터 이미 황향(黃香, 동관한기東觀漢記 卷17 黃香) [4] 의 효행이 있었다. 장성하여서는 힘써 농사를 지어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므로 몸에 편하고 입에 맞는 것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병이 나니 북극성에 기도하고 손가락의 피를 드리니 목숨이 열흘간 연장되었다. 돌아가신즉 시신을 목욕시키면서 시수를 핥고 삼켰다. 염장을 함에 있어서는 가력을 다 기울였고,

동생 동은과 더불어 상제를 지키기를 매우 엄격히 하였다.

술과 고기를 일체 입에 대지 않았으며 묘 앞에 려막을 짓고 비와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울부짖으니,

끝내는 몸이 쇠약해져 어머니 상기도 다 못 마치고 죽었다. 이에 비통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은은 매일 반드시 저녁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폈다. 어머니에게 종기가 나면 입으로 고름을 빨아 드렸고 눈에 병이 생기면 눈꼽을 핥았다.

돌아가신 후에도 이와 같이 하여 몸가짐을 깨끗하게 가짐에 힘쓰고, 그 상례를 행하는 데 있어서 형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로부터 난 성품이며 진실로 이른바 난형난제라 할 것이다.

또 횽년이 들면 형제가 미곡을 내어 족척과 이웃을 구제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효성이 미루어 나타낸 것이다.

석류(錫類) [5] 의 이치가 과연 어긋나지 않아서 동은의 아들 광의도 역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고 변을 맛보았으며 하늘에 기도하고 려묘살이를 하여

나아주신 바를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한 가문에 3명의 효자가 나온 것이 어찌 기울어 가는 세속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동려가 살아 있을 때부터 사람들의 공의가 일제히 일어나고 유자들과 향당의 장첩이 쌓여 책을 이루어 정문을 세우고 표창할 것을 기대하였는데,

다만 이를 위에 올려서 알릴 방도가 없는 까닭에 장차 묻혀서 없어지려 한즉, 이에 사람들이 그 마을에다 려를 지어 표창할 원대한 계책을 세웠으니,

우리 군 인사들의 효를 넓히고자 하는 뜻이 지극하다 하겠다.


이 려를 지나는 사람들이 반드시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며 말하기를 “동려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탁행이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이름이 장차 이 려와 더불어 계속될 것이다. 우리들도 또한 사람인지라 어찌 문득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하고서 다투어 서로 본받을 것을 사모하고

각자 스스로 면려하여 모든 사람들이 순임금과 증자가 되면 이 려가 풍속을 교화시키는 것이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주장한 것이 누군가 하면 사인 김정진과 김달영이다.

내가 한 지방의 풍속을 교화할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강제로 이 일을 기록하라고 시키니 감히 문장이 짧은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신해(1851年, 諱 광의 32歲) 10月 수원 이등 몸소 짓다. 





孝子金東礪東殷兄弟行蹟。

有國旌孝之典匪獨爲孝者地也, 爲不孝者勤也。

何也雖孝如大舜曾子不過是盡子職而已, 固若無事於闡揚, 然自古今能者少不能者多, 不得無激勸之方則其在頹俗不容少緩, 而亦宜自幽潛地先之也。

安山之西有孝子金東礪東殷兄弟者盖委巷之人也尤豈不可敬乎。

東礪自髫齡已有黃香之行, 及長力農養親便身適口之物莫不畢具, 病則禱于北辰進以指血得延旬日之命, 喪則沐浴也舐呑屍水斂葬也竭家力而與弟東殷守制甚嚴。

不酒不肉廬于墓前不避雨雪晨夕號哭, 竟至毁瘠母喪未期而卒, 人莫不悲之。

東殷日必定省母病腫必吮膿病眼必舐眵, 死後猶然務令潔身而歸其執禮一如其兄之爲, 此實由於根天之性而眞所謂難兄難弟者歟。

且歲(▒A)兄弟出米穀以濟族戚隣保, 此亦孝之推也, 錫類之理果不爽東殷子光儀亦血指嘗糞禱天廬墓無忝所生則一門三孝豈叔世之易得者乎。

自東礪生時公議齊發儒狀鄕牒積成卷(▒B)以冀卓楔之典而但登聞無階將歸湮沒則(▒C)以廬表厥里爲久遠計吾郡人士廣孝之意於是乎至矣。

過此廬者必式之曰東礪何人也而卓行能感人名將與此廬相終始, 吾儕亦人耳何(▒D)不若競相慕效, 各自勉勵人皆爲舜曾則此廬之有補於風化者豈少乎哉。

主其事者誰士人金定鎭金達永也, 以余任一邦風化之責强使記之不敢以文辭焉。

辛亥十月 日水原李等 親製。


(▒A) : 歉, (▒B) : 軸, (▒C) : 迺, (▒D) : 遞



[ 정려문 1875년 ][편집]

효자정려문

孝子學生金東礪之門 上之十二年 乙亥四月 日 命旌

효자 학생 김동려의 문. 상 12년 을해(1875년) 4월 일 정려를 명하다.
정려문 소장[3]

[ 교지 1988년 ][편집]

교지

敎旨

學生金東礪贈

通訓大夫司憲

府監察者

光緖十四年六月 日

▒ ▒ 孝 行 早 ▒ ▒ ▒ 贈 職 事 承 ▒ 

학생 김동려에게 통훈대부 사헌부감찰을 준다.

광서14년(1888년) 6월 일 효행으로 증직하라는 교지를 받들다.

[ 김동려 생몰 / 처 본관 ][편집]

안동김씨 2015 을미 대동보


김동려 字 명녀 기유생 을해 유월 공이행려문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경자 사월팔일 졸
배 증숙부인연성김씨 신축 오월일일 부 운교 묘 안산선영


[ 김동은 생몰 / 처 본관 ][편집]

안동김씨 2015 을미 대동보


김동은 생부 시영 9-1051 자 명익 병진생 증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 정사 십일월이십오일 졸 공이효행려문
배 숙인경주최씨 정사 구월오일 졸 부 연복
배 숙인경주김씨 계해 십일월삼일 졸

김광의 자 사유 경진생 경인 칠월이십구일 졸
배 전주이씨 신축 이월이십오일 졸

[ 효자 형제 김동려 김동은 형제 상계 ][편집]

7대조[6] 조선 찬성공(贊成公) 김이경(金以鏡, 1594~1678)
자(字)는 군회(君晦)[7], 처 진주정씨 정효성(6대에 걸친 효자, 열부 家門[8])의 딸.
15대조[6] 조선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 1341년 ~ 1407년)
자(字)는 평보(平甫), 호(號)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7]
19대조[6]  고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년~1300년)
자(字)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7]



각주[편집]

  1. 안산문화원 안산향토사연구소 발행 ♠푸른매♠ 2016 Vol.89, Page.4
  2.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3. 3.0 3.1 안산문화원 안산향토사연구소
  4. 황향(黃香, 18∼106년)
    동한(東漢 25年 ~ 220年) 강하(江夏 지금의 무한시의 일부 지역과 호북성의 일부 지역)사람이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나 깊고 간절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효자라고 하였다.
    황향은 고생을 락으로 삼아 부지런히 일하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그는 무더운 여름날 아버지의 베개와 이부자리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해드리고
    추운 겨울에는 아버지의 이부자리를 먼저 그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드렸다.
    황향이 열두 살 때, 그 지방 태수 유호가 그의 효을 듣고 그를 보고는 문하효자(門下孝子)라고 쓴 큰 액자를 보내 그를 기특해하고 고귀한 효행을 칭찬하였다.
    황향은 어릴 때 이미 경전을 열심히 읽어 해박한 지식으로 글을 지었으며 그가 지은 글은 경성에서 이름을 날렸다. 사람들은 그를 “강하의 천하무쌍 신동”이라고 칭찬하였다.
    처음에는 낭중에 올랐다. 화제 때 상서령에 추기를 관장하는 등 총애를 받았다. 위군태수로 옮겼는데, 고을의 수재를 당하자 녹봉과 포상으로 받은 물품을 내어 이재민들을 구제했다.
    나중에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9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섬기는 자세가 지극히 효성스러워 여름에는 베갯머리를 부채질을 하고 겨울에는 몸으로써
    이불을 따뜻하게 했다고 한다. 이 고사가 ‘황향선침(黃香扇枕)’이다. 그의 효행이 <후한서(後漢書)> 열전 편에 실려 알려졌고, <이십사효(二十四孝)>의 하나로 중시되면서
    여러 문헌에서 거듭 기록되고 칭송됐다. 중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선친온금(扇枕溫衾)’이라는 사자성어로 황향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서도 이미 신라시대의 최치원을 비롯해 고려시대 문인들이 황향의 이름을 들어 행위의 본보기로 삼았고 조선 초기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조선 후기 정조의 명으로 편찬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효자 편에 황향이 실렸다. 조선후기에 유명한 효자들을 모아 그린 병풍 그림에서도 황향의 모습은 빠지지 않는다.
    대개 둥근 부채로 이부자리를 부치고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5. 시경 대아 기취(詩經 大雅 旣醉)에 "효자불궤 영석이류(孝子不匱 永錫爾類 : 효자가 끊어지지 아니하니 길이 너희에게 복[福]을 주리라.)”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효자의 행실이 널리 퍼져서 효자가 계속하여 나오게 됨을 이른 말이다.
  6. 6.0 6.1 6.2 안동김씨 2015 을미 대동보
  7. 7.0 7.1 7.2 안동김씨 대종회
  8.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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