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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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시달(尹時達)[편집]
조선 후기 삼도통어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내고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직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임종하였고, 1694년에 복관되었다. 1818년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출생 1622년 9월 28일사망 1693 12월 7일
안장 1694년 4월 28일
본관 칠원(漆原)
출생지 충남 청양
본관은 칠원이며 충효공(윦환, 렴말 묺핫시중)칠원윤씨 세거지인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윤완(尹浣: 의금부 도사, 효자)과 증정부인 예안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1649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고, 1656년 알성시에 급제함으로써 두 번 급제를 하였다.
충청수군절도사. 경기도수군절도사. 남.북병사. 삼도통어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으며, 부총관 시절 1689년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직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1693년 12월 7일 임종하였다. 우암 송시열과 文谷(金壽恒: 1629〜1689)하고 교분이 친밀하다는 이유로 흉악도 장계 속에 들어가게 되어 함경북도 종성(鐘城)으로 유배를 맞아 귀양 갈 때 많은 명사들이 전송하였다 한다. 노론의 영수이고 기호학파의 거장이신 송시열 선생과 지인의 연으로 인하여, 붕당에 동참한 것으로 간주하고 남인의 상소에 의해 유배를 당하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비분의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관으로 오직 군인정신이 뼛속까지 배인 인물이기에 더욱 억울한 연루임을 간과치 않을 수 없으리라 본다. 판서 신여철은 그대 같은 충성과 의리의 그 명예는 이곽의 당적에 걸려 있을 것이니 위대하다고 했다. 1694년 4월 4일 관직이 복관 되었으며, 1695년에는 조정에서 제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818년 3월 10일 병조판서에 증직 되었다.
후손 성원이 시달 초상화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잘 전해지고 있는데, 조선 후기 복식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배 정부인 경주이씨와의 자는 무자로 공의 이제(二弟) 시적의 자를 계후 하였고, 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교지 해문[편집]
윤시달위겸교동도호부사자 경기도수군절도사겸삼도통어사
1687년 1월 19일 교동부사윤시달
참고 문헌[편집]
칠원윤씨 족보
繼傳 윤성원
행장 송환기 찬
승정원일기 사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嘉善大夫 行三道統禦使 贈兵曹判書 漆原尹公 諱時達 小考(2021, 윤경
수)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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