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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희 (18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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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희
본명박용희
출생1885년 7월 2일
교하
사망194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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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대한민국
학력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직업교육자, 기업가, 정치인
소속중앙고등보통학교, 중앙학원, 경성방직, 한국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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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희(朴容喜; 1885년~1948년)는 일제강점기 교육자(중앙학교), 사업가(경성방직과 동아일보 창립 발기).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한국민주당 초대 재정부장을 역임하였다.

1. 초년기[편집]

  1885년 7월 2일 교하(交河;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남서부에 위치한 교하동)에서 태어난 박용희는 대한제국 학부(學部)에서 시행하는 일본유학 관비유학생 모집 시험에 합격하여 학업을 위해 1903~4년경 도일하였다.[1] 그러나 박용희가 처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901년 10월 17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 효고현지사 핫도리가 외무대신 고무라에게 보낸 공문(병발비제532호)에 따르면 한인도래의 건에 박정선, 김규진, 조종혁, 한생동과 박용희의 이름이 보인다. 그들 5명의 학생은 목적을 일본유람이라고 밝히고 10월 17일 인천항에서 스미다가와호를 타고 그날 오후 3시 47분에 미츠노미야역발차열차편으로 교토로 향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아마도 일본 유학에 나서기전 사전 탐방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일본으로 가서는 東京의 順天中學에서 학업을 시작하였으며, 1906년 동경제일고등학교(東京 第一高等學校)에 진학하였다.[2] 순천중학(順天中學) 재학 시절부터 우등상을 타는 등 일찍이 학업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던 것을 알 수 있다.[3] 그의 가정은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으나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부친 박창훈(朴昌勳)은 향후 아들이 관직에 진출할 것을 원하여 교육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2. 일본 유학 시절[편집]

  유학생 시절 박용희의 행보에 관한 기록은 주로 재일유학생단체의 소식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박용희가 단체 설립 당시부터 관여한 재일유학생단체 태극학회(太極學會)는 일본어 강습소를 기반으로 조직되었으며 서북 지방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단체로 1905년 9월에 설립되었다. 1905년 초 몇 명의 선배 유학생들은 새로 도일한 유학생들에게 어학을 가르쳐주고자 東京市 本鄕區에 일본어 강습소를 설립하였다. 당시 박용희는 동경대학 공과대에 재학 중이던 상호(商灝), 장응진(張膺震), 그리고 일본 외국어학교 학생인 후지이(藤井孝吉)라는 일본인과 함께 일본어 교사로 참여하였다. 박용희는 일본 유학생 중에서도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일본 생활을 한 선배의 입장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태극학회 회원이었던 문일평文一平)은 자신을 비롯한 다수의 유학생들이 이 강습소를 거쳐 각급 학교로 진학하였다고 회고하였는데, 태극학회는 바로 이 강습소의 교사와 출신 학생들을 기반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태극학보 제2호에서 당시 유학생 감독이었던 한치유(韓致愈)가 단체 설립의 계기를 밝히고 있는데, 강습소 과정을 마치고 각기 다른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면서 서로의 거주지역이 달라 친목 도모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월 1회 모이는 자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당 강습소는 주로 국비 유학생보다는 사비 유학생들이 거쳐갔으며, 입회 자격 조건은 별도로 없었지만, 단체 설립은 서북 지방에 연고를 둔 학생들이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극학보에 따르면 창립 초기 회원은 약 50~70명이었으며 새로운 유학생들의 가입이 이어지면서 1908년 말에는 227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박용희는 태극학회 창립 당시부터 평의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06년 학회 조직이 개편되면서 간사 직책도 추가로 맡았다. 태극학회 설립의 기반이 되었던 강습소는 1906년 9월 일본어와 보통학을 가르치는 太極學校로 거듭났는데, 강습소 시절 교사 역할을 하였던 박용희는 태극학교의 간사 직책을 맡아 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하는 등 1900년대 중반 재일유학생 사회에서 비교적 큰 비중을 갖는 인물이었다.[4]

  󰡔태극학보󰡕 제2호(1906.9) 「本會會員名錄」에 의하면 박용희는 회장이자 발행인 장응진과 부회장 최석하(崔錫夏) 바로 아래로 분류된 <평의원> 6인 중 일인이었다. 같은 호 <회원소식>란에는 “本年 九月學期에 各 學校 會員 入學”이라 하여 6명의 입학 정보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박용희는 “會員 朴容喜氏는 第一高等學校에 入學하다.”라는 문장과 함께 첫 번째로 소개되고 있다. 또 태극학보의연금 씨명란에 태극학보 발행을 위한 의연금에도 박용희는 5원을 출연하고 있다. 그가 입학한 도쿄의 다이이치(第一)고등학교는 교토의 다이산(第三)고등학교와 더불어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기본적으로 제국대학 입학 전 예비 교육 차원의 역할을 맡는 유망한 교육기관이었다. 다이이치고등학교를 거친 박용희는 이후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법과대학에 진학, 1913년 7월 정치학과를 졸업하게 된다.[5] 대학시절에도 유학생 단체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어가는 가운데 영문학에 큰 관심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극학보에 게재한 다수의 글에서도 역사와 문학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짐작할 수 있으며, 동경제국대학 재학 중에는 영문학 분야에서 상을 받기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박용희는 태극학회 조직 운영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극학보󰡕 제3호(1906.10.24.)에 會事要錄에 “九月 二十四日 任員會를 開하고 太極學校 規則을 改定한 後에 全永爵氏로 校監 朴容喜氏로 斡事를 撰任하다.”라는 기록이 있어, 조직 개편 중에 박용희가 ‘간사’라는 직책을 추가로 맡았음을 알 수 있다. 9월호와 마찬가지로 태극학보의연인 씨명에 박용희는 5원을 기부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박용희는 특히 태극학회가 월간으로 발행하는 태극학보에 연재물을 게재하는 저작 활동에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용희의 저작물들은 역사 및 문학 분야에 속했는데, 「해저기행」을 제외한 박용희의 연재물은 전부 ‘歷史譚’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박용희의 역사담 시리즈는 콜럼버스 전기의 첫 번째 편을 1회로 하고 크롬웰 전기의 마지막 편을 21회로 하여 󰡔태극학보󰡕 에 게재하였으며, 세 차례의 누락이 있는 「해저기행」과는 달리 중단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역사담’은 박용희의 주력 집필자이자, 󰡔태극학보󰡕 에서도 주요 연재물로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6]

첫 번째 연재물 「클럼버스傳」은 ‘최근세문명의 태두’로 콜럼버스를 소개하는 것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인한 경제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두 번째 연재물 「비스마­ㄱ (比斯麥)傳」에서는 비스마르크 전기를 통해 동아시아와 같은 위기에 놓여있던 프로이센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였는지 동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으며, 세 번째 연재물 「시싸­(該撤)傳」에서는 정세로 볼 때 동아시아의 지도자로서 적합한 인물은 로마의 율리우스 시저와 같은 ‘時代的 人物 卽 仰望的 豪兒’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네 번째 연재물 크롬웰 전기에서는 국민정신의 결집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개신교를 제시하고 크롬웰을 ‘우리나라가 갈망하는 종교적 호걸(我國渴望之敎 傑)’이라고 지칭하였다. 이들 연재물을 통해 유학시절의 박용희는 모국인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세계가 서구 열강에 의해 위기에 처해있는 것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각 영웅에 대한 서술에서 무엇보다도 의지와 정신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7] 박용희가 보인 현실 인식은 당대의 지식인 유학생들이 공감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진화론적 세계관이 강자의 논리임에도 동아시아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생존경쟁이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경쟁력 길러야 한다는 실력양성론의 근거로 작용하였다. 「해저기행」의 경우 쥘 베른의 소설을 번역한 것인데, 총 11회 연재 중 1회부터 6회까지를 박용희가 번역하였으며, 6~8회와 9~11회는 다른 필명의 인물이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쥘 베른 소설이자 과학소설로 꼽힌다. 박용희는 1회 서두에서 ‘독자들을 과학의 심오한 뜻으로 이끌고 견문을 넓히는 진실한 이야기에 미치도록 할 것’으로 밝혀 흥미의 요소가 더해진 소설을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역사담’을 연재할 때와 마찬가지로 계몽적인 의도로 해당 소설을 번역, 연재하였음을 의미한다.[8] 따라서 태극학보에 게재한 박용희의 연재물은 졸업 이후에 이어지는 그의 행보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이라 하겠다.

창립 초기부터 약 2년간 지속하였던 박용희의 태극학회 활동은 1907년에 종료된다. 1907년부터 진행된 유학생 단체들의 통합 운동 전개과정에서 박용희는 최린, 김낙영 등과 함께 태극학회의 평의원에서 사임하였기 때문이다. 박용희의 재일유학생단체 활동은 이후 대한학회와 대한흥학회에서 이어진다. 대한학회는 1908년 2월 대한유학생회와 낙동친목회, 호남학회, 광무학회 등 4개 단체가 통합하여 설립한 단체로, 기존 연구에 따르면 태극학회는 1907년에 유학생 통합단체 설립과정에서 탈퇴하였다고 한다.[9] 박용희는 태극학회에서의 직책을 사임한 이후 대한학회의 창립에 참여, 학회 평의원이자 회계원으로 임원진에 합류하였다. 이 같은 행보에서 박용희가 유학생 통합 단체의 설립에 대의를 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박용희는 대한학회에서 발행한 대한학회월보 제1호에 ‘국민적 단합정신을 부르짖는다’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하였는데, 이는 유학생 통합 단체에 관한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이었다고 하겠다.

  박용희는 대한학회에서도 회계원, 운동부 등 임원진 활동을 이어가면서 유학생 단체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지속하였다. 당시 이러한 재일유학생 단체는 주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회비 및 기부금으로 학회지 발간 등의 활동을 이어갔기 때문에 대한학회월보에 매달 회비를 낸 회원들의 명단을 싣고 있다. 회원 수가 200명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유학생 신분으로 정기적으로 회비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박용희는 50전(錢)~2원(圓) 정도의 회비를 매월 정기적으로 납부하면서 유학생 단체 활동에 애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임했다.

  대한학회는 재일유학생단체의 통합을 지향하면서 탄생했지만, 설립과정에서 태극학회와 관비유학생 단체인 공수회(共修會)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통합을 이룬 단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단체 통합의 움직임이 계속됨에 따라 1909년 1월에는 완전 연합을 실현한 대한흥학회 창립에 성공, 대한학회를 비롯한 각 단체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박용희는 대한흥학회에서도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지도부 활동을 이어갔다. 대한흥학회 지도부는 회장, 부회장뿐만 아니라 평의원 전체를 총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이었음을 고려할 때 박용희가 재일유학생 사회에서 수행해온 역할과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한흥학회는 통합 단체였던 만큼 회원 수 등의 규모도 이전보다 크게 확장된 조직이었고, ‘흥학(興學)’이라는 단체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국계몽운동, 실력양성운동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었다. 따라서 학회지 발행과 배포가 주요 업무 중 하나였는데, 기존 유학생 단체들이 최대 1,000부 내외를 발행하였던 것에 반해 대한흥학회는 2,500부를 발행하여 국내 각 단체와 학교, 신문사 및 미주와 시베리아 동포에게 무료로 배포하였다. 학회지 발행과 더불어 방학 기간에는 직접 국내에 강습소를 설치하는 등의 교육운동도 시행하였는데, 이렇게 유학생 시절에 단체의 임원으로서 계몽운동의 기획과 실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험이 박용희 후일 행보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용희는 대한흥학회의 주요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궁극적으로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하는 유학생단체의 애국계몽운동은 일본 당국의 감시와 제약 속에 있었기 때문에 박용희 역시 당국의 시찰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는 절차를 실행하자 국내에서는 일진회가 한일합방론을 주창하였는데, 1909년에는 일진회 총재 송병준이 일본 각지에서 ‘한일연합안’에 관한 순회 연설을 한 일이 있었다. 당시 대한흥학회는 이를 매국행위로 간주 12월 8일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이를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박용희는 당시 대한흥학회 평의원 자격으로 12월 6일 회원들을 귀국시켜 합방 반대 및 일진회 해산 운동을 시행하기로 결의하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해당 모임의 참석자 명단과 결의 내용 전체를 내부 시찰국에서 파악하였음은 물론이다. 대한흥학회가 1910년 8월 일본 당국에 의해 강제해산 당함에 따라 1905년부터 일본유학 시절 동안 지속했던 박용희의 재일유학생단체 활동도 종료되었다. 대한흥학회의 강제해산으로 당국의 감시 등에 영향을 받은 듯 박용희는 대외적으로 별도의 행보를 보이지 않은 채 학업을 이어가다가 1913년 여름 동경제국대학에서의 학업을 마친 이후 귀국하였다.

3. 식민지 조선에서의 활동[편집]

귀국 이후인 1913년 10월 박용희는 조선총독부 내무부 산하의 지방국 제1과에서 보조 문관에 해당하는 속(屬)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어[10] 근무하였음을 조선총독부 직원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11] 유족에 따르면 박용희 본인의 뜻이라기보다는 관직에 진출하기를 원하는 부친의 강력한 의사를 수용하였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지방국 제1과는 ① 도·부·군·면 행정 ② 지방비 ③ 부군 임시은사금 ④ 신사 및 사원 ⑤ 종교 및 향사 ⑥ 병사(兵事) ⑦ 지리 지적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곳으로, 박용희는 이곳에서 문관으로서 관련 행정 업무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약 1년 후인 1914년 10월 박용희는 조선총독부 고등보통학교인 경성전수학교 교유(敎諭), 즉 교수로 임명되면서 조선총독부 속과 교수직을 겸임하게 되었다.[12] 경성전수학교에서는 정치학을 강의하였다고 한다.[13] 경성전수학교는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박용희가 임명되었을 당시 조선인 교유는 박용희 1명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1915년에는 김병로가 교유로 임용되었다.[14] 박용희는 경성전수학교에서의 생활도 약 2년 만인 1916년 7월에 마치게 되는데,[15] 부친상이 사퇴의 계기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사망하자 조선총독부 체제하에서의 관직 생활을 이어가야 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경성전수학교를 퇴직한 이후 박용희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유학시절에 배운 강대국의 문화를 직접 접하는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16]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도 그는 한동안 대외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은 채 고양과 파주 등지에 있는 가족 소유 토지의 상속 허가 및 이용권 변경과 처분 등을 처리하며 가업을 돌보았다.[17]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가산 관련 사무가 이후 동아일보와 중앙학교 그리고 경성직뉴회사에서의 활동과 어떠한 연관을 갖는지에 관해서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을 기점으로 박용희의 전면적인 대외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박용희와 동아일보 창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김성수의 관계는 일본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용희는 김성수가 일본에 유학한 1908년 10월 당시 대한학회 평의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김성수는 대한학회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몇 개월 후 창립한 대한흥학회에는 설립 초기부터 회원에 참가하였음을 초기 회원명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대한흥학회는 5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회 가입만으로는 박용희와 김성수의 관계를 추정할 수 없지만 실질적으로 매달 회비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학회 활동에 참가한 인원으로 범위를 좁혀보면 해당 범위 안에 꼽히는 회원은 13명 정도에 불과한데, 이 중 박용희와 김상수, 송진우, 이강현 등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의 설립에 관여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09년 4월에 대한흥학회는 운영 조직을 개편하였는데, 당시 김성수가 간사원으로 선출되면서 운영진에 합류하였다. 박용희는 운영조직의 개편 이전에는 평의원으로, 개편 이후에는 총무원으로 학회 설립 초기부터 임원진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김성수와의 관계를 대한흥학회 활동을 계기로 다져진 것으로 볼 수 있다.[18]

1919년 9월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표방한 이른바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1910년대까지의 언론통제를 완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19] 이 같은 사이토 총독의 입장 발표 이후 논의를 거쳐 총독부는 조선인들로부터 신문발행 신청을 받았다.[20] 동아일보는 총독부 조선어 기지 <매일신보> 편집장이던 이상협, 일본인 발행의 <평양일일신문> 조선어 주간을 지냈던 장덕준이 도쿄에서 신문제작을 논의한 이후 ‘신문경영의 재정을 위하여’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던 최두선을 통해 김성수에게 협력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해당 시점이 1919년 7월로 사이토 총독이 아직 부임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허가 여부는 알 수 없는 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를 대상으로 신문발행 허가를 받는 일에 앞장선 사람은, 총독부기관지의 기자 출신으로 총독부 관계자들과의 접촉이 가능했던 이상협이었다. 이상협은 1909년 도일하여 게이오대학에서 수학한 인물이지만, 당시 박용희 혹은 김성수와의 교유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활동상의 접점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존재하는 회고와 기록에 따르면 사이토 총독이 부임한 이후 직접 총독을 만나 민간 신문발행 허가를 요청하고 대답을 들은 이는 이상협이었다고 한다.[22] 당시 이상협이 신문발행건에 대하여 ‘선배들의 지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김성수가 신문 제작에 합류한 시점부터 박용희도 동아일보 창간을 위한 준비작업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문발행 허가신청을 낸 뒤 3개월만인 1920년 1월 6일자로 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의 발행을 허가했다. 당시 총독부는 <동아일보>를 민족계 언론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3] 발행허가가 나온지 8일째 되는 1920년 1월 14일 주식회사 동아일보사(株式會社東亞日報社) 발기인 총회가 열렸다. 이때의 발기인은 모두 78인으로 전국 13도에 고르게 분포되도록 하였다. 박용희는 경기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경기> 박영효(朴泳孝) 장두현(張斗鉉) 이응선(李應善) 장춘재(張春梓) 임면순(任冕淳)

박용희(朴容喜) 김우영(金雨英) 이강현(李康賢) 이경세(李慶世) 이상협(李相協)

김병태(金炳台) 현준호(玄俊鎬) 김성수(金性洙) 고윤묵(高允黙) 나홍석(羅弘錫)

이정렬(李定烈)

<충북> 유세면(劉世冕)

<충남> 이상덕(李象德) 김영복(金永福) 정재원(鄭在源) 성원경(成元慶)

<전북> 김기중(金祺中) 정해로(鄭海魯) 박창진(朴昌鎭) 이철환(李鐵煥) 홍종철(洪鍾轍)

은성우(殷成雨) 김기동(金箕東) 강방현(康邦鉉) 변광호(邊光鎬) 정봉수(鄭鳳洙)

박정식(朴正植)

<전남> 박하일(朴夏馹) 김형옥(金衡玉) 고하주(高厦柱) 고광일(高光馹) 박이규(朴珥圭)

김영수(金榮洙) 이재혁(李載赫) 서맹수(徐孟洙)

<경북> 정충원(鄭忠源) 김승묵(金昇黙) 최 준(崔浚) 손수문(孫秀文)

<경남> 문상우(文尙宇) 안희제(安熙濟) 김시구(金時龜) 윤상은(尹相殷) 윤병호(尹炳浩)

윤현태(尹顯泰) 지영진(池榮璡) 김병규(金秉圭) 허 걸(許杰) 김홍조(金弘祚)

이종순(李鍾淳) 이종화(李鍾和) 손영돈(孫泳暾) 문영빈(文永斌) 김종원(金宗元)

이병목(李炳穆) 최연무(崔演武)

<강원> 이봉하(李鳳夏)

<황해> 김영택(金泳澤) 이승준(李承駿) 이 운(李雲) 장덕준(張德俊) 장덕수(張德秀)

이태건(李台健) 이충건(李忠健)

<평남> 이효건(李孝健)

<평북> 오희원(吳熙源) 최준성(崔浚晟) 이규증(李規曾) 장희봉(張熙鳳)

<함남> 김순선(金舜善) 김효택(金孝澤)

<함북> 이종호(李鍾浩)


  1920년대 초부터 박용희는 동아일보 발기인을 비롯, 중앙고등보통학교 경영과 경성직뉴주식회사와 경성방직에서 감사, 전무 등의 직위에 있으면서 교육, 언론, 경영 전반에 걸쳐 활발히 활동하였다. 특히 경성방직주식회사에서는 주식 20,000주 중 1020주는 보유하여 김경중(김성수의 생부, 2,000주 보유)에 이은 두번째 대주주이기도 하였다[24]. 박용희는 동아일보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후 동아일보 창립총회에서는 감사로 선임되면서 이사회 중역이 된다. 또, 중앙고등보통학교는 김성수가 1915년 4월 사립중앙학교를 인수하여 계동 1번지로 학교를 이전하고 1921년 4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은 것으로, 박용희는 이 시점에서 장현식과 더불어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영자로 참여하였다.[25] 김성수가 중앙학교를 인수하고자 하였을 당시 김성수의 생부 김기중과 양부 김경중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던 것도 박용희였다고 전해지며, 이를 계기로 박용희는 장현식과 더불어 중앙학교 경영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박용희는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 소재의 임야 약 100만평을 중앙학교에 기증하였는데, 이 자산을 기초로 1929년 재단법인 중앙학원이 설립됨에 따라 박용희는 김성수, 김기중, 김경중, 김연수, 김재수, 장현식과 더불어 중앙학원 설립자가 되었다.[26] 경성직뉴주식회사에는 이보다 이른 시기부터 관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성수가 해당 회사의 경영권을 1917년에 인수하였는데, 1921년도 자료에 박용희가 해당 회사 감사로서의 기간이 만료되어 연임한다는 기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27] 따라서 박용희는 적어도 1917년 이후~1921년 사이의 기간부터 김성수와 협력관계 속에서 회사 운영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용희가 1920년대 전반에 김성수의 경영활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은 ‘조선인산업대회’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1920년대 초반은 문화운동 진영에서 ‘산업진흥’ 등 실력 양성의 구호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던 시점이었으나, 조선의 토착 자본은 일본 자본의 힘에 밀려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1920년대 전반 일본 자본주의는 식민지 한국에 대하여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 상품의 소비시장, 자본의 진출대상지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총독부의 산업정책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조선의 토착 자본은 조선총독부의 보호와 협력을 얻고자 하였고, 총독부 또한 식민지를 운영함에 있어 조선의 산업을 일방적으로 고립시키면 안된다는 견해에 따라 식민지 산업정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1921년 9월 구성한 것이 산업조사위원회였다. 산업조사위원회가 구성된다는 발표가 있자, 조선 산업계는 상당한 기대를 표시하며 그들의 요구를 반영시키기 위해 ‘조선인산업대회’를 발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28] 박용희는 이 발기 준비위원회의 조사위원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7월 말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총회에서 간부로 선임되었다.[29] 동아일보에서도 산업조사위원회의 개막에 즈음하여 수차에 걸친 사설을 통해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을 세울 것을 촉구하며 ‘조선인산업대회’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1920년대 전반에 나타나는 박용희의 행보는 개인으로서의 활동보다는 동아일보 및 경성방직의 중역으로서 수행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박용희는 김성수와 더불어 1919년 12월에 창립된 조선경제회(朝鮮經濟會)에도 참여, 대내외적으로 조선실업계 인사로서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조선경제회는 회장 박영효(朴泳孝), 부회장 최진(崔鎭), 이사장 최준(崔浚), 상무이사 17명, 이사 73명, 고문 1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경제회의 상무이사진과 이사진, 고문단을 구성하는 인사들에는 유민회, 대한협회, 헌정연구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했던 인물과 더불어 이강현(李康賢), 김성수(金性洙), 박승직(朴承稷), 박용희, 조희경, 김한규(金漢奎), 주성근(朱性根), 김정호(金正浩), 김진옥(金鎭玉), 전명기(全命基) 등처럼 실업계 인사가 다수 참여하여 결성된 조선인 부르주아지 단체였다.[30]

  박용희와 김성수가 교육과 언론, 산업 전반에서 1920년대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 긴밀한 관계 속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유학 시절의 대한흥학회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 실력 양성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로의 전환 속에서 유학(儒學) 이 아닌 근대학문, 지식에 기반한 ‘근대적’ 지식 엘리트의 첫 번째 세대였다. 이 때문에 유학생 스스로 국가, 민족의 장래를 책임질 의무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자부하며 애국심의 고취와 문명 국민으로의 각성을 주장하며 적극적인 현실 비판과 계몽 활동을 전개했었다.[31] 즉, 박용희는 김성수와 더불어 유학 시절 경험했던 계몽 활동을 귀국 이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20년에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의 중역으로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던 박용희는 1920년대 중반 이후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의 중역 자리에서는 물러나고 대주주로서만 존재하게 되는데, 아마도 경영 일선보다는 교육 사업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5월부터 9월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박용희는 조선인 사회에서 교육자이자 독지가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보성전문학교에 10,000원을 기부한 일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으며,[32] 서울의 유력한 재산가로 알려지기도 하는 등 조선인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알려졌다.[33] 이러한 가운데 1935, 36년에 경성 蛤町 渼芹町(오늘날 서대문구 합동, 미근동)에서 總代와 위생조합장을 역임하였던 이력은 종래 박용희의 행보에서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측면이 있다. 1910년대에 이미 스스로 경성전수학교 교유직을 사퇴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총대와 위생조합장의 직책은 표면적으로는 지방제도의 행정 말단에 불과하나 1930년대는 조선인 상공계통 종사들이 총대 등을 역임하는 일이 증가한 시기였다. 이는 한편으로 조선에서 자본주의 관계가 확대됨에 따라 상공계통 종사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였음을 반영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공계통의 종사자들이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가운데 관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자 식민지하에서 지역사회의 이익 문제를 대변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34] 박용희는 1930년대 중후반 대동고무주식회사를 경영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중일전쟁의 발발로 고무 공급이 통제되어 사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35]

4. 해방 이후 정치 활동[편집]

  해방 이후 박용희는 사회지도층으로서 국가건설에 참여하는 행보를 보인다.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수많은 정당과 단체들이 출현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간 후 독립된 조선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자 다양한 성향의 정치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성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와 경성방직 그리고 보성전문의 지식인들은 미군정으로 여당으로 분류되는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의 주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박용희 역시 김성수, 송진우 등과 더불어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재정부 부장에 선임되어 한민당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당시 미군정 보고서는 한민당의 재정권을 김성수가 장악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36] 박용희가 재정부 부장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김성수와의 긴밀한 협력관계가 해방 이후의 활동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정국에서 박용희는 이승만의 지지자이자 후원자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민당 인사들은 이승만에게 숙소인 돈암장과 정치자금을 제공했는데, 당시 박용희가 주요 후원자였다고 한다. 당시 박용희는 이후 김성수를 국무총리로 지명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승만에게 후원금을 지원하였다고 한다.[37]

  한민당은 해방 직후 결성 과정에서 동우회, 흥업구락부 등 기독교 계열의 단체와 동아일보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당으로, 인민공화국에 반대하고 임시정부를 추대한다는 정치적인 명분을 가지고 창당되었지만, 하나의 정치노선이나 사상을 가지고 조직된 정당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민당 내부에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38] 결국 1946년 좌우합작위원회가 시작되고, ‘3상회의의 결정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 ‘무상분배’를 핵심으로 하는 토지개혁 등을 주장하는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면서 한민당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한민당 내 비주류로 분류되던 원세훈의 탈당 성명을 기점으로 한민당 내부에서 비주류 계열, 특히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지하고 있었던 세력들의 대거 탈당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39]

  1946년 10월부터 일어난 대규모 탈당은 대체로 한민당 내 비주류 세력으로 분류되던 인사들의 탈당이었으나 11월 말 당시 중앙위원이었던 박용희가 당원 17명과 함께 탈당하였다. 당시 박용희의 당내 영향력으로 인해 언론에서도 박용희의 탈당을 주목하였다.[40] 그러나 박용희가 별도의 탈당 성명을 내지 않았을 뿐더러 탈당한 세력들이 한민당에 반대하는 정치 노선에 합류한 데 반하여 박용희는 이후로 어떠한 정치 활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탈당과 관련한 추가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아마도 당내 구심점 역할을 하였던 송진우의 갑작스러운 피살, 한민당 내부 대립의 격화로 인한 통합의 어려움 등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용희가 일본에서 유학생회 활동시절부터 유학생 단체 통합을 주장했던 점, 그가 남긴 글에서도 강조되었던 '국민적 단합정신', '국민정신의 결집' 등을 반추해보면, 좌우합작운동의 실패와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 등이 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한민당 탈당을 비롯하여 이후 전개 상황이 건강에도 영향을 준 듯, 박용희는 1948년 8월 병환으로 별세하였다.[41] 박용희의 탈당 원인과 이후의 행보에 관한 이야기는 당사자가 남긴 기록이 없는데다 아직까지는 전언에 불과하므로 사실관계가 보다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민당 인사들과의 관계를 비롯한 해방 이후의 행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 당시 일본에 입국한 한국인을 보고하는 자료에 明治19년생 박용희를 포함한 5인이 입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출생연도에 오차가 있으나 동일인인 것으로 보인다. (韓人渡來ノ件, 要視察韓國人擧動 2) ; <<學部來去文>>11 光武八年十月七日

[2] 태극학보 제2호 ; 중앙교우회, 1968 중앙60년사, pp.35~36

[3]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박용희의 동경제국대학교 법과대학 졸업증서와 동경제일고등학교 학력인정서가 소장되어 있어 그의 학창시절을 알 수 있다.

[4] 한시준, 1988 國權恢復運動期 日本留學生의 民族運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2, pp.36-37

[5] 경성공직자연감에는 1907년경 졸업한 것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06년 9월에 제1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는 태극학보의 소식란이 정확하다면 1907년에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유학생 연구’에 따르면 박용희는 1913년 7월에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했다.

[6] 손성준, 2012 근대 동아시아의 크롬웰 변주 : 영웅 담론․영국 政體․프로테스탄티즘, 大東文化硏究 제78집, P.244

[7] 손성준, 2012 근대 동아시아의 크롬웰 변주, PP.244~249 ; 손성준, 2012 도구로서 제국의 영웅, 현대문학의 연구47, PP.23~32

[8] 김종욱, 2008 쥘베른 소설의 한국 수용과정 연구, 한국문학논총, PP.61~63

[9] 지역적 연고에 기반을 두었던 재일유학생 단체들은 1906~7년부터 단체 통합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태극학회에서는 최석하, 최린, 박용희 등이 통합운동에 찬성하였으나 태극학회가 연합론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이들은 태극학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한시준, 1988 國權恢復運動期 日本留學生의 民族運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2, p.44

[10] 敍任及辭令, <조선총독부관보> 1913.9.30

[11] 조선총독부직원록 1913

[12] 敍任及辭令, <조선총독부관보> 1914.10. 28

[13] 중앙교우회, 1968 중앙60년사, pp.35~36

[14] 경성법학문학교 일람 (1925.1.)에 따르면 박용희는 1914년 10월부터 1916년 7월까지 경성전수학교 교유로 근무하였으며, 법률학 교유 김병로는 1915년 9월에 부임하였다. 박용희 이전에 근무하였던 조선인 교유로는 석진형(1911.11.-1913.3.)과 양대경(1912.12-1914.10)이 있었다.

[15] 敍任及辭令, 조선총독부관보 1916년 6월 26일

[16] 중앙교우회, 1968 중앙60년사, pp.35~36

[17] 彙報, 조선총독부 관보 1916년 1월 21일, 1918년 2월 8일, 1920년 10월 19일

[18] 안종배, 2008 김성수의 일본유학과 인간관계네트워크의 형성 -대한흥학보 분석을 중심으로-, 세계한국학대회 4회 발표논문, PP.4~10

[19] <齋藤實文書>, 1권, 476쪽

[20] <경성일보>1919.10.11

[21] <동아일보>1960.4.1

[22] 박용규 2018, 1920년 조선어 민간신문 창간의 배경과 과정, 한국언론학보, pp.118~120

[23] 高等警察年表, 齋藤實文書20 ; <조선일보>는 비정치적인 실업신문을 지향하였으며 , <시사신문(時事新聞)>은 친일신문으로 출발했다.

[24] 中村資良, 1921 朝鮮銀行會社要錄

[25] ‘中央學校의 盛運, 새로히 학제을 고치게 되고 유력한 경영자로 朴容喜 張鉉軾량씨 참가(肖)’ <동아일보> 1921.4.6

[26] ‘六十萬圓으로 成立된 財團法人中央學院 金祺中 金性洙씨 등 칠씨가 거액을 염출하야 조선민간교육계에 일대공헌을 하여 中央高普校의 隆運//無常한 盛衰裡에 七百健兒養成[寫: 瑞光에 싸인’ <동아일보> 1929.2.18

[27] ‘商業及法人登記’ <조선총독부관보> 1921.6.2

[28] 역비한국학연구총서 근대편

[29]‘ 臨時朝鮮人産業大會 發起總會’ <동아일보> 1921.7.30

[30] 이승렬, 2007 경성지역 중추원 참의들의 關係網과 식민권력의 지역 지배, 서울과 역사69, pp.115~116

[31] 이태훈, 2013 한말 일본유학생들의 자기인식과 계몽논리, 한국사상사학 제45, p.3

[32] '最近 篤志家의 美擧’, <<삼천리>> 7권7호

[33] ‘機密室, 우리社會의 諸內幕’, <<삼천리>> 12권8호

[34] 서현주, 2002 「朝鮮末 日帝下 서울의 下部行政制度 硏究」, 서울대학교박사학논문, pp.199~200

[35] 중앙교우회, 2009 계동일번지, p.210

[36] 《미군정 주간보고서》 부록 “Political Trends #16” 1946년 1월 12일.

[37] 중앙교우회, 2009 계동일번지, p.210

[38] 박태균, 1994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 개편, 국사관논총58, p.101

[39] 박태균, 1994, pp.114-115

[40] ‘한민당 중앙위원 崔養玉 외 20여명이 탈당’, <서울신문> 1946.11.28 ; ‘韓民黨 80명 又復 대거 탈당’, <자유신문> 1946.12.7

[41] 중앙교우회, 2009 계동일번지,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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