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용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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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용균(杜用均, 1902년∼1972년)은 일제강점기 및 건국초기의 한학자(漢學者)로 간행서인 시해집(詩海集)이 전하고 있다. 본관은 두릉(杜陵))이고, 옥구군(현 군산시)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남은(南隱)이다
가족관계[편집]
남은 두용균(杜用均)선생은 조선말기 통정대부(通政大夫) 두홍하공의 고손(高孫)이며 조선말 호남의 거유인 두재표(杜宰杓, 1860∼1904)선생의 손자(孫子)이다. 두용균(杜用均)의 가문의 연원은 두릉두씨(杜陵杜氏)의 족보와 중앙일보사(中央日報社)에서 발행한 『성씨의 고향(姓氏의 故鄕)』과 『한국인의 족보(韓國人의 族譜)』등의 문헌에 따르면, 시조(始祖) 두경녕은 중국 송(宋)나라의 두릉인(杜陵人)인데 송의 태종(太宗) 때에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자리에 있었는데, 당시 그는 진종(眞倧)의 옹립은 반대하다가 실패하여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좌천되자, 이에 아들인 중서사인(中書舍人) 두지건(杜之建)과 우습유(右拾遺) 두지봉(杜之逢) 형제를 데리고 정처없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1004년(목종 7)우리나라의 궁지현(宮池縣: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읍,만경현(萬頃縣)에 있는 궁지도(宮池島)라는 지금의 고군산도(古群山島)에 표착하게 고려에 귀화하였다.[1,2] 당시 고려의 조정에서는 이 사실의 알고 목종(穆宗)이 두경녕에게 좌사관(左史官)이란 벼슬을 내리고 궁지현(宮池縣)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두릉군(杜陵君)에 봉했다.[1,2]
생애 및 활동상황[편집]
두용균(杜用均)선생은 자(字)는 사철(士澈) 호를 남은((南隱))이다. 송나라 태종(太宗)조에 병부상서를 지낸 시조(始祖) 경녕(慶寧)공의 28세손이고, 고려 명종(明宗)조에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난을 평정한 무장(武將)이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신 경승(景升)공의 22세손이며, 조선조 선조(宣祖)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충청도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신 선무공신(宣武功臣) 정란(廷蘭)공의 13세손, 근세조선말기 고종(高宗)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홍하(洪夏)공의 증손(曾孫)이다. 선생께서는 조선 말기 혼돈의 시기인 1902년 임인(壬寅) 정(正)월 23일 현재 군산시 회현면 금광리 원당에서 후초거사(後草居士) 두병근(杜炳根)공과 자당(慈堂)인 담양전씨(潭陽田氏)의 7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나셨다.1972년 임자(壬子) 6월 5일 향년 70세에, 10여년간 고혈압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두용균(杜用均)선생은 유년시절인 일제강점기에 호남지역의 유명한 학자인 송성룡선생과 한학을 같이 공부하였고, 그후 교류하며 절친한 친우이었다. 천자문(千字文)부터 추구(秋句),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 대학(大學)등을 일찍이 습득 하셨으며, 한문으로 직접 작성하신 글을 남길 정도로 문장에도 능하셨다. 호남지방의 거유이셨던 조부 두재표 선생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아 서당에서 후학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며 훈장(訓長)으로 활동하셨다.
남은(南隱)선생은 성품이 대쪽같이 곧으신 분으로 올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신 올곧은 학자 이셨고, 말씀이 적으셨으며 매사에 엄격하시고 근면하며 부지런하셨다,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수탈의 고통 속에서 유년기와 청년시절을 보내셨고, 해방 후 혼란과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의 참상(慘狀)을 겪는 등 아주 어려운 시기에 옥구군 지방의 유학자로 지역사회 문화발전에 기여 하셨다.
부군(府君)께서는 제자 및 자손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을, 형제들을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자식들에게 엄격하면서도 근검절약하는 정신을, 집안 관혼상제 등 대소사에 적극 참여하고 봉사하는 모습 등을 직접 보여주고 가르쳐 주셨다 .당시의 매우 어렵고 고단한 환경 속에서도 독학(獨學)과 주경야독(晝耕夜讀) 으로 한문을 익히셨고, 서당훈장(書堂訓長)으로 후학을 가르치셨다.
남은(南隱)선생은 유학자로서 지역사회 옥구향교에 나아가, 지역사회 유학자들과 함께 인간의 삶의 가치와 윤리 의식을 고취(鼓吹)하는 일에 참여 하셨고, 이를 이웃과 자식들에게 전수(傳授)하는 모습도 보여주셨다. 또한 1961년 옥구군지(沃溝郡誌) 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여 지역사회 문화창달(文化暢達)에 기여하셨다. 어려운 사회적 및 가정환경 속에서도 교육을 통해서 자손을 가르치고 성장시켜야한다는 교육관이 확고한 분이셨으며,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앞으로 보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평소부터 기르도록 가정교육을 철저하게 시키셨다. 남은(南隱)선생께서는 자식들에게는 항상 엄격하셨지만 부모에 대한 효심은 지극하셨다. 차남으로 분가된 상태였지만 아침 일찍이 부모님께 문안드리는 것을 생활화 하셨다. 충효(忠孝)가문(家門)으로서 선대(先代)가르침에 충실 하고자, 종중(宗中)일과 선영봉영에 솔선수범하셨고, 1961년 두릉두씨 세보(辛丑) 발행시에는 종친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찾아다니며, 후손에게는 조상의 얼을 심어주고 자긍심을 갖도록 노력하셨다.
1965년에는 조선말기의 학자이신 고조부(高祖父) 재표 공의 시, 서편, 책문 등 유고(遺稿) 모아서 시해집(詩海集)이라는 문집을 발간하셨으며,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조선군의 최초의 전승지인, 이치대첩(梨峙大捷)에 참가하여 선봉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운 15세선조인 두정란 장군의 생애와 공적을 기록한 금곡지를 중간(重刊)한 금곡사지(金谷祠誌)발행에도 열성으로 참여하시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일제시대에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폭파되었던 이치대첩비를 1963년에 재건(再建)하는데 후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셨다. 이와같이 선생께서는 국가에대한 애국심과 선조에 대해 효(孝)와 숭모정신(崇慕精神)이 투철하신 분이셨다.
『두재표(杜宰杓) 『시해집(詩海集)』간행[편집]
두재표의 『시해집(詩海集)』은 2권 2책 석인본으로 군산 옥구에서 1964년에 손자인 남은 두용균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1은 시로 주로 자연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나 평소의 소회(所懷)를 읊은 것이 많다. 230여수가 전한다. 권2는 서로는 여인면학서가 있고 서문은 족보서ㆍ국포서ㆍ교궁양노소계서ㆍ계서가 있다. 기문은 망경대기ㆍ경성당기가 있으며 잡저로는 낙거론ㆍ처인택거론ㆍ학치론ㆍ사친훈ㆍ석고송ㆍ찬금마모인ㆍ상량문이 있다. 표는 9편이 전하며 책문은 장문으로 전한다. 부록으로는 가장ㆍ묘갈명ㆍ추모사서ㆍ찬사ㆍ봉하문집간행이 실려 있다. 또한 아들 두병민(杜炳敏)의 『소계유고(小溪遺稿)』가 추가로 실려 있다.
<참고 문헌: 호남기록문화유산>
저서[편집]
시해집[ 詩海集 ] 원저 두재표 간행 두용균, 1966년
언론매체기고[편집]
군산미래신문, 조선말기 학자 두재표 선생 <시해집 국역본> 발간 (2018년11월27일)
군산신문,두재표 선생‘시해집(詩海集) 국역본’ 발간(2018년 11월27일)
정읍시사,두재표 선생‘시해집(詩海集) 국역본’ 발간(2018년 12월5일)
참고문헌[편집]
『杜陵杜氏 世譜』1898년(戊戌)
『杜陵杜氏 世譜』1961년(辛丑)
『杜陵杜氏 世譜』1986년(丙寅)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966
『옥구군지(沃溝郡誌)』節義條 옥구향교, 1924
『沃溝郡誌』옥구군지 편찬위원회, 옥구군 1990.11
『沃溝人物誌』옥구문화원 1991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 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청백교직자 청담두진열선생』(청담선생추모문집발간위원회,2019)
[[분류:|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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