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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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필규'(杜必奎, 1816년[6월 16일]]∼1885년[11월 5일]])는 조선말기의 자선가이다. 본관은 두릉(杜陵)이고, 군산시( 옛 옥구현)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하였다. 호(號)는 인재(忍齋) 이다[1][2]
가계[편집]
송나라 진종(眞宗) 함평연간(咸平年間) 병부상서 휘(諱) 경령(景寧)공은 충직하게 직언극간(直言極諫) 하여 진종의 의사에 거스리게 되어 중서사인(中書舍人) 지건(之建) 우습유(右拾遺) 지방(之逄) 거느리고 고려국 궁지현(宮池縣) 현금(現今) 만경현(萬頃縣)에 도착하여 고려 조정(朝廷)에서 특별히 만경현을 식읍지로 사패(賜牌)하고 또한 두릉군(杜陵君)에 봉하였다. 그분이 우리나라 두씨 시조(始祖)이시다.[3]
두방(杜邦) 공은 문하시랑(門下侍郞)벼슬 하였고,[4] 평장사(平章事) 및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신 두경승(杜景升) 공은 서경(西京,평양)을 평정하여 벽상공신(壁上功臣)에 봉하여졌다. [5]근세조선(近世朝鮮)에 와서는 두승손(杜承孫) 공이 병마우후(兵馬虞候)을 역임하셨으며, 만경(萬頃)에서 옥구현 옥산(玉山)으로 이주하여 세거(世居)하였다.
두세준(杜世준) 공은 효성이 지극해 조정에서 효자 정려(旌閭) 세우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두헌(杜憲) 공은 공훈(功勳)있어 선무랑(宣務郎:문관 종6품 관직)에 임명되었고, 장수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에 올랐다. 두사순(杜思順) 공은 현감을 역임하셨다. 두정란(杜廷蘭)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 지킴에 충정을 다하였으며,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가하여 순절함으로써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봉하여졌으며 금곡사 및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지금까지는 11세 이상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여량(杜汝良) 공과 두인휘(杜仁揮) 공은 문장(文章)으로 글을 잘 써서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두석무(杜碩茂) 공은 효도로써 유명하여 회현면 금광리 원당(元堂)에 정려문이 세워져 있다. 두우응(杜友膺) 공 두문수(杜文守) 공 두상효(杜尙孝) 공 부친인 두원식 (杜元植)공은 효도와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6]
생애 및 활동상황[편집]
두필규 杜必奎은 자(字) 자방(子芳) 號 인재(忍齋) 이다. 공은 공은 옥구현 지역의 자선가로 순조(純祖 16) 1816 병자 6. 16일 회현 원당에서 조선말 유학자 두원식(元植)공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고종(高宗 22) 1885 을유 11. 5일에 향년 70세로 별세하셨다.
원래 부인 진주강씨 어사공 휘 원전(元鐫) 후손 영만(永萬) 女로 자녀 낳아 기르지 못하고 후계(後繼) 자식 없다. 계배(繼配, 후실)은 제주고씨 문충공 경(慶) 후손은 재극(齋極) 女. 자녀는 4남 2녀 영하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홍하는 참봉, 창하 명하 모두 부친 봉작(封爵) 이어받고 가훈에 따라 부모 효도하고 형제 우애하였다.
공은 본성이 어질고 순수하고 예절과 행동이 두터웠고 공손했다. 어려서 효친하고 형제와 우애하며 친척 이웃 간에 화목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비록 집안이 빈하여도 항상 이웃을 도와주어 빈궁하게 사는 것을 마을에 두지 않으려 하였고 1876년(고종13) 병자 임계년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재산 풀어 이웃에 은혜를 베풀어 구휼(救恤)에 앞장 셨으며, 공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사람들이 많았다. 오호라 공은 “덕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인(仁)을 이루는 것 좋아하는 것(好德成仁)” 가히 천부적으로 타고난 자질이었다. 공의 후손들이 때때로 이름을 떨친 것은 공이 효도하고 우애하고 친척 이웃 간 자선을 베푼 음덕 때문이다. 무릇 새겨 이르기를 “벼슬 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화려한 집안에 효도하고 자선 베푼 것은 천부적이다.” “공이 쌓은 음덕은 반드시 자손에게 미치게 될 것이고 두씨 집안이 번창하여 그것이 볼만하구나.”[7]
규장각 제학 김회수(金晦秀) 근찬(謹撰)
평가[편집]
공은 전라도 옥구현 지역의 자선가 이다. 1876년(고종13)병자 임계년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재산 풀어 이웃에 은혜를 베풀어 공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사람들이 많았다. 오호라 공은 “덕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인(仁)을 이루는 것 좋아하는 것(好德成仁)” 가히 천부적으로 타고난 자질이었다.
규장각 제학 김회수(金晦秀) 근찬(謹撰)
묘소 및 배향[편집]
- 회현 죽동 쌍분 2005년 5월 파묘 원당 두릉두씨 납골당
- 배향은 매년 음력3월 첫째주에 고향인 군산시 회현면 원당 재각에서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참고 문헌[편집]
『고려사』 100권 열전13 두경승편
『고려사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966
『옥구군지(沃溝郡誌)』 옥구향교, 1924
『옥구군지(沃溝郡誌)』 옥구향교, 1963
『沃溝郡誌』옥구군지 편찬위원회, 옥구군 1990.11
『沃溝人物誌』옥구문화원 1991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 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 1990
『杜陵杜氏 世譜』1898년(戊戌)
『두릉두씨 세보 [杜陵杜氏世譜]』 1925.
『杜陵杜氏 世譜』 두릉두씨대종중, 1961년(辛丑)
『杜陵杜氏 世譜』1986년(丙寅)
『청백교직자 청담두진열선생』(청담선생추모문집발간위원회,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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