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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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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896년 9월 13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377번지에서 오연문(吳然汶)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오동균은 어려서 사촌형 오의균의 문하로 흥동 장학당에서 수학하였다.

고창의 독립만세운동 전개과정[편집]

고창의 3.1운동 전개과정을 보면, 고창군의 만세운동은 정읍에 인접한 성내면에서부터 시작돼었다. 성내면 월산리에 살고 있던 청년 이종철과 학생 이대성, 이종주, 유판술 등은 만세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하고 선언서 등사와 취지서를 작성했다. 1919년3월10일 밤에 이대성,유판술 등은 이종주 집에 비밀리 모여, 다수의 종이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붙이거나 세워뒀다. 새벽에는 ‘대한독립(大韓獨立)’과 ‘독립(獨立)’이라고 크게 쓴 종이 2개를 만들어 장대에 붙여 성내면 면사무소 구내 공터에 세워 놓았다. 아침이 되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선언서와 격려문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3일 학교 앞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전단도 뿌렸다. 하지만 결국 이 사실이 흥덕면주재소에 알려지고 이종철 등 4명이 검거돼 성내면 거사계획은 좌절됐다. 며칠 후 무장면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도 읍내의 김영완은 고종 황제 국장을 앞두고, 서울에 올라갔다가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유지 이용욱, 김용표, 김상수, 이준구, 김진호, 박흥선, 오태근, 박흥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결정하고 3월 15일 무장읍 장날을 이용해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 드디어 1919년 3월15일. 장꾼들이 많이 모이기를 기다리던 이용욱·김용표 등은 미리 등사해 두었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줬다. 김영완은 군중들 앞에 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자 군중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따라나섰다. 이용욱·김응표 등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지휘하며 대열을 지어 시위행진을 시작했다. 만세의 물결은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으로 나가며 기세 드높게 행진했다.

3.1운동 당시 활동사항[편집]

1919년 3월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오동균은 김승옥(金升玉)과 함께 「독립선언문」과 「국민휘보(國民彙報)」, 「조선독립가(朝鮮獨立歌)」 등의 문서를 구입하여 이를 다량으로 등사한 후, 읍내 유지 및 학생들과 연락하여 고창읍 장날인 3월 19일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일본 경찰에게 누설되어 예정일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게 되자, 3월 21일 오전 11시, 1백여 명의 시위 군중을 모아 놓고 독립 만세 시위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역설한 후,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오동균 등은 도중에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았지만 더욱 기세를 올려 고창군청으로 행진, 군수와 군청 직원들에게도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결국 1919년 7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후 활동사항[편집]

1928년 4월 28일에는 항일 민족 운동 조직체로 일본 경찰에 의해 지목된 전라북도기자대회사건 때 부의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독립촉성회 고창지부 부회장으로 건국 준비에 참여하였고, 김성수(金性洙)와 백관수(白寬洙) 등을 도와 한민당 창당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나,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10월 21일 화산리에서 학살당했다.

참고[편집]

  •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창향토문화백과
  • 이기화 편저, 『고창의 맥』(고창문화원, 1991)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나라사랑 광장(http://narasarang.mpva.go.kr/)
  • 국가보훈처 발행 ‘독립운동사 제3권:삼일운동사(하)_2장 전북서부지방 제5절 고창군 편’
  • 전라일보 2019년 5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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