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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 (14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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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오준은 고려시중을 지낸 문헌공 오대승의 8세손, 구성군 오잠의 5세손으로,조선 전기 고창 출신 효자이며,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과거 전설의고향에서 TV에 방영되기도 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편집]

오준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예절을 숭상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28세 때인 1471년(성종 2)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3~4일을 연명케 하였다. 그 후 부친 오팽년이 등창으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입으로 며칠 동안 종기의 농혈을 빨아서 병이 나았다. 그러나 얼마 후 합병 증세로 아버지의 목숨이 위태롭자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예단하고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먹이는 등 정성을 다했으나 그 해 4월 1일 죽고 말았다.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 꼭 두 달 만에 아버지까지 죽게 된 것이다.

이에 오준은 취령산 아래 양지 바른 명당 터에 부모님을 장사 지내고 묘 아래 여막을 짓고 시묘를 하였는데, 하루에 죽 한 그릇으로 연명하며 소금과 간장을 입에 대지 않는지라 온몸의 털이 하얗게 변하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집에서 따라온 개와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함께 뒹굴며 오준을 지켜 주었다는 것이다. 삭망 때면 호랑이가 날쌔게 산짐승을 물어 와 제수로 받쳐 주기도 하였다.

또한 근처에 샘물이 없어 오준이 매일 새벽 두어 마장 거리에 있는 뺌산<秀山>에서 물을 길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천둥과 벼락이 요동치더니 여막 아래에 샘물이 솟구쳐 생수가 넘쳐났다. 하늘이 감동하여 천지조화로 거두어 낸 맑은 감천수였던 것. 이 소문을 듣고 고을 수령이 달려와 샘의 둘레를 정자식 석축으로 개수. 오준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내려 준 샘이라고 하여 이름을 효감천(孝感泉)이라 짓고 샘가에 표석 비를 세워 주었다. 이후 이 샘에서 운이라는 여인이 불결한 속옷을 빨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오준이 잠을 자고 있는데 개처럼 거느리던 호랑이가 꿈에 나타나서는, 양고살재 넘어 백암마을 함정에 빠져서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오준은 상복 차림 그대로 20리나 되는 험한 고갯길을 넘어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호랑이가 꿈속에서 말한 대로 사람들이 창칼로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죽이려고 하였다. 오준은 다급하게 "범을 해치지 말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당신이 임자면 저 함정에 들어가 보라."고 다그치자 오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호랑이가 잡혀 있는 함정으로 들어갔고, 호랑이는 주인을 만난 개처럼 반가워했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흥덕현감이 감사와 어사에게 알려서 왕에게 장계를 올렸다고 한다.

사후[편집]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에 있다. 1494년(성종 25) 조정에서 오준의 행적을 가상히 여겨 정려를 내리고, 뒤에 군자감직장에 임명하고 호역을 면제하였으나 벼슬은 주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통선랑을 증직. 또한 성종 말에 유림들이 향현사에 위패를 봉안했는데, 1748년(영조 24) 진사 백시명 등이 상언하여 창효사(彰孝祠)로 현판을 바꾸고 법지리로 이건. 1868년(고종 5) 원래의 위치인 신림면 외화리에 다시 지은 뒤 오준을 주벽으로 모시고 향사하고 있다.

영조 때에도 그의 효행의 행적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져 이천보와 김재로, 정유양, 조명현 등이 효감천의 명문을 지어 탄미하였다. 또한 대제학 남유용이 묘비명을 짓고, 호남 실학의 거두 황윤석, 호남 석학 기정진 등이 『효감천실기(孝感泉實記)』 서문을 지었다.

유적지[편집]

창효사[편집]

전북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 창효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의 사우. 오준(吳浚)을 배향하고 있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서 통선랑군자감직장(通善郎軍資監直長)이라는 벼슬을 받았는데, 이 사우는 1494년(성종 25) 그의 효행을 추모하던 선비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뒤에 다시 세운 것. 현재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형 맞배지붕 목조건물이며, 그 옆에는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만들어 주었다는 효감천이 있다.


효감천(孝感泉)[편집]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 산73번지에 있는 조선 시대 우물로서, 전북 기념물 제43호이다.효감천은 오준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하늘이 벼락을 쳐서 만들어준 샘입니다. 지금도 그 샘이 남아 있고, 그 앞에는 효자문이 세워져 있어 효(孝) 교육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감천효행칠도[편집]

감천효행칠도(感泉孝行七圖),

感泉公廬墓圖(감천공여묘도) 살아계실 때 다하지 못한 효를 돌아가신 후에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정성을 받쳐 효를 다했다.

擔壺汲水山外(담호급수산외) 가가운 곳에 깨긋한 물이 없어 눈비 맞으며 물병 메고 5리길 산 너머로 물을 길러 다녔다.

天雷湧泉廬下(천뢰용천여하) 하늘이 지극한 효성에 감동 벼락을 쳐 땅을 파서 여막 옆에 샘물이 솟게 하니 효감천이라 한다.

邑倅卽馳甃井(읍졸즉치추정) 벼락쳐서 샘을 판 사실을 알게된 흥덕고을원님께서 직접 인부를 인솔하여 샘돌을 쌓고 주변 공사를 재촉하여 끝냈다.

朔望虎獻生鹿(삭망호헌생록)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호랑이가 사슴을 물고 와서 바치니 삭망치전에 제수가 풍족하였다.

狗虎同庭乳雛(구호동정유추) 개의 천적인 호랑이가 여막에서 서로 만나 사이좋게 지내며 강아지에 젖을 먹이는 자비를 베풀었다고 한다,

雲伊汚泉震死泉邊(운이오천진사천변) 하늘이 효자를 위해 파준 우물에서 운이라는 여인이 추한 빨래로 천을 더럽히니 그 자리에서 벼락맞아 죽었다.

가족관계[편집]

고조부:오선(밀직사사)

  • 증조부:오자귀(한림승지)
    • 조부:오석산
      • 부:오팽년(동지중추부사)
        • 배우자:숙부인 전주최씨


참고자료[편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창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전북대학교 박물관, 1984)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코리아(http://www.gochangkorea.co.kr/)

동복오씨 대종회(https://web.archive.org/web/20151006202622/http://www.dongbokoh.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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