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에 대한 비판
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Message box/localize' not found. 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Message box/localize' not found.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에 대한 논란과 비판적 의견 및 박근혜 측의 해명을 기술한 문서이다.
정계 진출 이전[편집]
박근혜는 1998년 대구광역시 달성군 보궐선거에 당선되는 것으로 정치인으로서의 첫 행보를 시작했다. 1979년 10월 26일 부친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이전까지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생활하였으며 부친의 암살 이후 청와대에서 나와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등을 운영하였다.
독재자의 딸[편집]
김정란 상지대학교 교수는 박근혜 의원이 '독재자의 딸'인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박근혜를 인정하는 것은, 박정희를 완전히 복권시키는 일이며,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민주화의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무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광에 대해서는 "박근혜가 아버지의 유산을 단호하게 정리하지 않고, 계속 그 신화를 누리려고 하는 한, 박근혜는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와 육영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여자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진보적 여성주의의 전망에 대해 "박근혜 지지는 순진한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작동할 확률이 거의 없다"며 "합리적 정책 개발이 아니라 지역감정을 이용해 정치적 기반을 쌓았다"며 일축했다. 오히려 "우리 사회를 지역주의의 망령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 판단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염려했다.[1]
언론인 서화숙은 한국일보 칼럼에서 박근혜를 박정희의 유산을 세습하려는 대선 후보로 규정하였다. 그는 박근혜가 '5.16 군사 반란'과 유신 독재에 대한 상식적 판단을 거부한다고 주장하였고, 인혁당 사건을 두고 '두 개의 재판 결과가 있다'고 말한 것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를 처형한 재판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체로 공직에서 물러나야 마땅할 망언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박근혜의 옹호자들은 박정희의 잘못을 덧씌우지 말라고 한다면서, 박정희의 딸이라는 모습을 걷어내면 상식 없는 망언하는 정치가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2]
한편, 가족 집권 혹은 2세 집권이라는 관점에서 박근혜 후보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는, 미국의 조지 부시(조지 H. W. 부시-조지 W. 부시), 아르헨티나의 페론(후안 페론-에바 페론-이사벨 마르티네스 데 페론), 4대 가문이 27년을 통치한 일본(요시다 시게루-기시 노부스케-하토야마 이치로-후쿠다 다케오), 3대에 걸쳐 집권한 그리스(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888년)-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952년)) 등의 사례를 예로 들며, 현대사에서 가족 집권이나 2세 집권은 최악의 성적표를 보여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통한 정권 교체가 필수적인 이유는 앞선 통치의 오류에 대한 교정의 필요성 때문인데, 가족 집권은 앞 통치의 극복, 즉 선친 부정이라는 근대 공화주의의 근본정신을 부정한다면서, 오류를 인정하지도 교정하지도 못함으로써 계속적인 퇴보를 반복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3]
2012년 12월, 미국의 언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한민국의 대선 소식을 전하면서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로 소개했다. WSJ은 "박 후보는 1960~1970년대 한국을 통치했던 군 출신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라며 "이전 선거에선 적어도 한 명의 후보는 박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다시 독재로 회귀할 거라 경고했었다"고 전했다.[4] 또한 뉴욕타임스와, AP통신도 박근혜의 당선 소식을 전하며 '독재자의 딸(dictator’s daughter)'이라고 표현했다.[5]
전두환으로부터 6억 수수[편집]
박근혜는 2007년 10.26 사태 직후 전두환으로부터 6억 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였다.[6] 1980년 박근혜와 그의 형제들 앞으로 6억 원의 돈이 지급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전 합수본부장에게서 9억원을 받은 뒤 김재규 사건 수사 격려금으로 3억 원을 되돌려 주었다는 것에 대한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7] 이 돈은 박근혜와 그의 두 동생에게만 지불되었다. 그리고 액수도 6억 달러 설, 9억 달러 설 등이 제기되어 왔으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두환의 자금을 받았다는 주장은 2002년 무렵하고 그가 당 대표로 있을 때에도 누군가에 의해 유포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박근혜는 언급을 회피해 왔다. 2007년의 인사 청문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되었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9억 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6억 원을 받았다. 유자녀 생계비 명목으로 받았고 돌려준 것은 없다. 전 합수본부장의 심부름으로 왔다는 사람이 만나자고 해서 청와대 비서실에 갔더니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쓰다 남은 돈이다. 생계비로 쓰라'고 전해 줘서 감사하게 받아 나왔다.[7]'며 생계유지비로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전두환에게서 9억을 받았다, 6억을 받았다는 등의 의혹으로만 제기되어 오던 것이 2007년의 인사검증회에서 그가 시인함에 따라 사실로 확인되었다.[8]
박근혜가 청문회에서 자금을 받은 것과 액수를 밝힘으로써 의혹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윤호중은 이를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박 전 대표가 전두환으로부터 받은 돈이 9억 원이 아니라 6억 원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빼고는 하나도 새롭게 검증된 것이 없는 청문회였다.[9]”는 것이다.
성북동 주택 취득 의혹[편집]
그에게 제기되었던 의혹 중의 하나는 성북동 주택을 취득한 경위였다. 이는 그가 한나라당 대표로 재직할 때에도 제기되었다. 박정희의 신당동 사저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으나, 2007년의 대통령 후보자 검증 청문회에 이르러 다시 언급되었다. 일각에서는 신당동 사저와 성북동 박근혜 자택을 오인하였으며 박정희 내외의 비극적인 죽음에 가려져서 묻혀졌으나 2007년 대선을 전후해 누군가에 의해 인터넷에 퍼지면서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성북동 주택은 기업인 신기수가 그에게 공짜로 주었다. 그런데 박 후보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에게서 성북동 주택을 증여받은 것과 관련해 탈세 가능성이 제기되었다.[8] 2007년 인사검증회 당시 "성북동 주택 신기수씨가 무상으로 줬나" 하는 의혹에 대해 그는 "아버지 유품 보관할 장소로 쓰라며 대가없이 주었다"고 대답했다.[7] 또한 일부 언론으로부터 5공화국 때인 1982년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성북동 주택을 무상으로 줬다는 의혹도 있었다.[7]
한편 그는 성북동 사저는 사사로운 청탁 목적은 아니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는 "나는 부모님이 사시다가 남기신 유일한 재산인 신당동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 유품을 정리해야 하는데 집이 너무 좁았다. 이런 사정을 알고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신 회장이 성북동에 집을 마련해 '유품을 보관할 장소가 있으니 이사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서 받아들였다.[7]"고 반론하였다.
육영재단[편집]
2007년 7월의 한나라당 인사검증 청문회 당시 박근혜는 육영재단 관련 의혹과 관련, 형제 간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 아니냐는 추궁이 잇따르자 "실체가 없는 일인데 자꾸 말이 커진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10] 육영재단 재산 착복 의혹[7] 이 제기되자 그는 '보수·판공비 일절 안받아… 전횡 소문도 사실무근.[7]'이라며 반박하였다. 박후보의 동생인 근령씨는 육영재단 운영을 놓고 대립한 문제가, 지만씨는 미국 유학과정에서 영남대 공금 전용 문제는 오래도록 도마에 올랐다.[11]
인사 청문회 당시 영남대, 육영재단 관련 의혹 중 "영남투자금융이 육영재단에 기부금을 출연한 것이 부적절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는 "얘기를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10] 말 실수도 있었다. 박 전 대표는 영남대 의혹에 관한 질문에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치는 과정에서 학교를 맡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책임"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병철 전 회장"으로 정정했다.[10] '82년 10월부터 90년 11월까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는데 보수와 판공비를 받은 적이 없는가.[7]'라는 질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육영재단 사람들이 이사장직을 맡아 유지를 이어야 한다고 건의해 책임을 느끼고 이사장을 맡았다. 보수와 판공비를 받지 않았다. 일주일에 2, 3번 출근했다.[7]"라고 답했다.
(박근혜가) '이후 육영재단 이사장을 퇴임한 이유와 관련, 최 목사와 딸이 박 전 대표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전횡을 일삼아 직원들이 반발한 것이 원인이라는 말이 있다.[7]'는 의혹에 대해 "어머니 기념사업을 육영재단에서 같이 했고, 당시 최 목사가 기념사업 일을 도왔다. 구조조정에 불만을 품은 직원들의 소요가 있었고, 오해가 있어서 '최태민 물러가라'는 식으로 데모가 있었지만 최 목사나 딸이 결코 육영재단 일에 관여한 적이 없다.[7]"고 반박하였다. 또한 육영재단의 운영 과정에서 최태민이 개입했다는 의혹 역시 제기되고 있다. 최 목사가 육영재단 고문의 직함을 갖고 이사장인 박 전 대표가 결재를 하기 전에 먼저 결재를 할 정도로 재단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7]는 의혹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최 목사가 고문직을 하지 않았고, 최 목사가 연로하여 고문으로 예우해 부른 것뿐이다.[7]"라고 반박하였다.
한편 "박근혜가 박근령의 육영재단 이사장 해임의 배후 역할을 했다"는 내용의 비방글이 동생 박근령의 남편이 적성한 것으로 드러났다.[12] 이 문제로 신동욱 교수가 징역 1년 6개월형에 확정되는 등[13] 논란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편집]
영남대학교 재단 이사장 시절의 전횡과 정관 1조에 '교주 박정희'라는 조항을 삽입한 것 역시 오래도록 문제시되어 왔다. 영남대 이사장 시절 전횡 의혹[7] 과 영남대 재단이사가 된 지 1년 후에 학교법인 영남학원 정관 1조에 '교주(校主) 박정희'라는 표현이 삽입된 사건[7]에 대해 "67년 영남대 설립 시 이사 전원이 서명한 결의문에 '교주 박정희'라는 글귀가 들어 있었다. 당시 이사 한 사람이 그것을 정관에도 넣자고 제의해 이사회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나도 이사회에 참여했고 찬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7]"며 아무 문제 없다고 답했다.
한편 영남대학교 재단 재산 착복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86년 당시 영남대학교 대학병원장 모씨의 해외출장비 명목으로 280여만원이 동생 지만씨의 항공료 등으로 지급됐고 병원장은 주치의 자격으로 박지만 씨와 미국에 함께 갔다.[7]는 의혹이 제기된다. 그에 대해 "그때는 몰랐지만 검증위 소명자료를 준비하면서 발견해 동생에게 알아 봤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7]"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영남대 병원장은 소환되지 않았다.
영남대 재단 비리에 육영재단을 끌어들이지 않았느냐는 의혹도 제기되어 왔다. '영남대 재단이 전액 출자한 영남투자금융회사는 육영재단이 발간하는 어린이 잡지 <보물섬> 등에 장기간 광고하고 광고비로 2,700여만 원, 기부금도 1억 3,000여만 원 지급했는데 알고 있었느냐.[7]'는 질문에 대해서도 "육영재단이 공익재단이기 때문에 영남투자금융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기부금을 받을 수 있다. 영남투자금융에 강요한 적은 없다. 경영진에서 판단해서 한 것으로 안다.[7]" 또, 영남대 재단 4인방으로 거론되는 김 모, 조 모, 손 모, 곽 모 씨 등을 직접 임명하지 않았느냐[7]는 인사 의혹에 대해서도 "(자신은) 결재선상에 있지 않았다. K 전 총장이 확인서를 써 줬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이명박 캠프에서 정책자문단으로 일하고 대구 지역에서 사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는 분이다. 확인서가 신빙성 있는 자료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7]"며 결백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남대 재단 운영 과정에서의 의혹은 수시로 야당 인사들에 의한 공격 표적의 하나가 되고 있다. 한편 박근혜가 영남대 재단 이사장 시절 운영에 개입한 확인서를 제출한 김기택 전 영남대 총장은 박근혜로부터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자 측 참모라는 역공을 받기도 했다.[11]
정수장학회[편집]
그가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때부터 '정수장학회 이사장 겸임때 탈세했다는 의혹[7]'도 줄곧 제기되어 왔다. 이에 대해 2007년 인사검증회에서 그는 '납세의무 있는지 몰라… 후에 퇴직금 정산해 납부했다.[7]'고 해명했다. '95~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를 지냈으므로 강제 헌납에서 자유롭지 않다. 설립 당시 이런 문제 알았나.[7]'는 질문에 대해 그는 "당시 상황은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강제 헌납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닌 것을 입증할 자료를 장학회가 가진 것으로 안다.[7]"고 해명했다.
또한 '적절한 시기에 재단 운영과 관련해 국가 헌납 등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용의가 있나.[7]'는 질의가 있었으나 그는 "공익재단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 안 된다. 이사회가 결정할 문제다.[7]"라며 이사회가 처리할 문제라는 말을 했다.
정수장학회 이사장 겸임 때의 섭외비 탈루 의혹도 제기되어왔다. '수억 원의 섭외비에 대한 세금을 탈세했다는 보도가 나오자[7] 그는 "매년 감독 관청에 보고했으나 세금 의무가 있는지 몰랐다. 법이 바뀌어 소득세를 내야 했으나 실무진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누락됐다.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 납부했다.[7]"고 해명했다. 98년 국회의원 당선 이후 그는 정수장학회의 이사장 및 비상근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7] 그러나 이때 급여를 받아 횡령이라는 주장이 나온다.[7] 그는 "출근을 안 한 게 아니라 일주일에 2, 3번 가서 결재했고, 행사가 있으면 가는 등 이사장 일을 다 했다. 횡령은 동의할 수 없다.[7]'고 해명하였고, 법원은 이에 대한 조사결과, 박근혜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계 진출 이후[편집]
1998년 정계에 입문한 박근혜는 한나라당 부총재, 대표를 역임했다. 이명박 반대 정서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몰린 2011년 12월에는 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의 승리를 이끌었다.
비판자들은 정계 입문 이후 박근혜가 타인과의 소통 능력이 부족하고, 측근들만 신뢰하는 비밀주의 정치를 한다고 봤다. 또한,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해 박근혜가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친데 대해 비판자들은 국가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소통 부재와 비밀주의[편집]
박근혜는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당내 인사들과도 소통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새누리당 인사들은, 발신번호 표시제한 전화로 연락이 온다, 솔직하게 터놓고 소통하지 않는다, 만나거나 접근하기 어렵다는 경험 등을 예로 들며 박근혜가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2004년 제17대 국회에서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와 함께 원내대표로 활동하였던 김덕룡은 박근혜가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넘어 "먹통"이라고 평가하면서, 당시 박근혜에게 정수장학회 문제를 털고 넘어가야 한다고 조언을 했지만 자신의 조언을 거부한 것은 물론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일화를 예로 들었다. 또한 박근혜에게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으며, 그녀의 참모들조차 그녀가 주요 현안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누구와 상의하는지 모른다고 주장하였다.[14]
박근혜는 자신이 가진 독단적인 이미지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2년 7월 11일 김문수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의 예방에 "박근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칠푼이다"라고 말했다.[15] 칠푼이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인데,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독재, 독단적인 면에 대해서도 칠푼이라 표현한 적이 있어 박근혜 의원과 친박계의 독선적인 당 운영에 대한 비판적 표현[16]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차남 김현철이 총선 때 새누리당의 공천을 못 받은 것에 대한 감정적 발언'[17]으로 보기도 한다.
2011년 9월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열풍'과 관련해 기자들이 박근혜에게 '안철수의 지지율이 자신을 넘어섰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반복된 질문에 대해 “병 걸리셨어요?”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민주당은 사과를 요구했고 이후 박근혜는 “지나가는 식으로 농담을 했는데, 표현이 부적절 했던 것 같다”라며 유감을 표명했다.[18] 박근혜는 2004년 MBC 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도 진행자가 경제 살리기에 대하여 질문하자 '지금 저하고 싸움하시는 거예요?'라고 언급한 것을 비롯해 올해 1월 복지 문제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한국말 모르세요?'라고 대답한 것 등이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박근혜 전 대표는 불편한 질문과 비판을 참지 못한다. 영애 박근혜님이 ‘평민’들과 겸허히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새로운 별호를 지어 올리고자 한다. '발끈해'"고 말했다.[19]
한나라당 친이명박계는 “박근혜는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폐쇄적 조직 문화가 팽배해 있다”며 “두 차례 대선에서 실패한 이회창 전 총재의 전철을 되풀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친박계 의원은 “국민들은 박 전 대표를 더 이상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있는 정치인이 아니라 독립적인 지도자로 바라보고 있다”며 “박 전 대표를 흠집내기 위한 어떤 시도도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였다.[20] 또한 친이계는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이라며 비판하였다.[21] 한나라당 강명순 의원은 "자신은 유신 시절 빈민 운동을 하느라 고생했는데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잘 먹고 잘 지낸 만큼 빚을 갚아야 한다"며 비판했다.[22]
5.16 긍정 평가[편집]
5.16 군사 정변의 주역이던 박정희의 차녀였으므로 그가 5.16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그가 정계에 입문한 1998년 이후 줄곧 이슈가 되어 왔다.
1990년 잡지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5·16과 4·19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박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역사 의식에 의문이[7] 제기되자 2007년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본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2007년 7월의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그는 '박 전 대통령 유지 계승' 역사의식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5·16은 구국(救國)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남북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흡수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혁명 공약에도 기아 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한다는 얘기가 나온다.[7]"는 것이다. 다만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판단유보를 내렸다. 5.16 뒤의 유신시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7]는 질문에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다만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고 고통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한다.[7]"고 답하였다. 이 때문에 야당 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한명숙 전 총리는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을 '구국의 혁명'이으로 규정한 데 대해 '망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한명숙은 2007년 7월 19일 "그가 5.16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미화한 것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있는 69만 국군 장병들에 대한 모독이자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민주 영령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23] 한명숙은 이어 "아직도 박정희 쿠데타 정권에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분들의 유가족이 서러움과 한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며 "고(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을 만나 고개를 조아렸던 때가 언제라고 또다시 독재의 유전자를 드러내냐"고 비난하였다.[23] 한 전 총리는 자신은 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유신시절 자신을 고문하고 투옥했던 가해자들을 용서했다고 말했지만 "박 후보의 망언은 이처럼 유신독재의 피해자들이 내미는 용서와 화해의 손을 뿌리치고 피해자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을 박는 잔인한 짓"이라고 언론에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23]
2012년 7월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의 5·16의 역사관에 대한 논란이 또다시 불거졌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박근혜는 "5.16은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여 과거 '구국(救國)의 혁명' 발언 당시의 생각과 변함이 없음을 밝혔고 이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합동 토론회에서 오마이뉴스의 여론조사를 인용[24] 해 "제 발언에 찬성하는 분이 50%를 넘었다"고 말하면서 사회적으로도 5·16 찬반 논쟁을 일게 했다. 그러나 박근혜를 칠푼이라 비하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상황을 빗대 "박근혜, 대통령 되기엔 결격 사유 있다"며 혹평[25] 하였으며, 박근혜가 언급한 것과 반대의 여론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26][27][28] 박근혜의 지지율은 다소 하락하면서[29] 박근혜는 "5·16은 정상적인 게 아니다"며 다소 입장을 바꾸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임태희 후보의 5·16 관련 질문에 "과거에 묻혀 사시네요"라며 반박하는 등[30] 역사관 논란을 피하려 하였다.
박근혜는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 군사 정변에 대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였다.[31] 이후 일부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9%가 박근혜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는 등 많은 논란을 낳았다.[32] 논란이 심해지자 8월 7일 한 토론회에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고,[33] 역시 이를 두고 정치권의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였다.[34] 5·16 군사 정변에 대한 박근혜의 발언에 대하여 5.16을 두고 박근혜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해석[35] 도 있지만,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부적절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출처 필요]
2002년 2억원 수수 의혹[편집]
2004년 2월 대선자금 수사에서 박 전 대표가 복당 과정에서 2억 원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고, 이 돈이 복당의 대가인지 의혹[7] 이 제기되었다. 그는 이것을 선거 활동비 명목이라고 해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당에 들어올 때 중앙선대위 의장을 맡았는데 당 사무총장으로부터 2002년 11월 26일과 12월 7일 1억 원씩을 선거 활동비 명목으로 받았다. 한나라당 입당 조건으로 받은 것 아니다. 미래연합을 운영하면서 빚진 것 있었지만 이 돈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7]'라고 해명하였다.
이명박과 정책적 유사성[편집]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는 이명박과 거리를 두고 있으나 완전히 돌아서지는 않았다. 대통령과 면담을 하면서 대통합의 의지를 담고 활동하였다. 과거 정책상 본질적으로는 이명박과 크게 다를바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근거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박근혜가 내세웠던 '줄푸세'나 당시 경쟁 후보였던 이명박이 내세웠던 '747' 둘다 공통적으로 감세 기조를 내세운 정책이라는 점이다. 또한 박근혜가 2008년 12월 국회의 감세 법안, 2009년 3월 금산분리완화법안, 2009년 12월 예산안 ─ 4대강 예산이 포함되었고 이른바 날치기 통과로 논란이 되었음 ─ 에 찬성해 이명박 정부 정책에 협조한 것도 있다.[36] 이를 빗대어 정치권과 인터넷 상에서 '이명박근혜'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명박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했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되게 만든 것이다. 또한 서울시의 무상 급식 정책 논란 때 바쁜 일정 속에 부재자 투표까지 참여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지원했던 이명박과는 달리 관련 사안에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2011년 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후 당명, 당 상징색, 강령 등을 변경하면서 MB정권과 기존 한나라당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불거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 악재 속에서도 "어느 정권에서나 민간인 사찰은 일어나며 나도 피해자"라며 논란을 피하기도 했다.[37]
한마디 정치[편집]
2008년 대선 이후 박근혜는 미국소 수입 협상에 대한 반발이 일던 가운데 이명박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거나, 미디어법 상정시 "반대표를 던질것"이라고 말하거나, 이명박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거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당시 이명박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차기 정권에서 계속 추진 할 것을 약속하는 등 중요한 사안에서 짧은 말을 던지는 일명 '한마디 정치'를 해왔다. 2010년까지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지켜온 박근혜의 이런 의견들은 당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친이계는 정부에 협조하지도,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는 박근혜의 모호한 행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박근혜를 당대표나,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방안을 고려해왔지만 박근혜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으며 친박계 의원이 당대표를 맡는 것조차 반대하는 등 소극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지지율 1위를 지키기 위해 너무 몸사리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명박과 화해를 하거나, 아예 다른 노선을 선택하여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38] 이러한 비판들 속에서 이명박 정권 취임 초기에 실시했던 자기 대선 후보들 지지율 조사에서 50%에 육박하던 박근혜의 지지율은 2010년 이후로 30%까지 하락했다.[39]
2010년 12월, 새해 예산안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통과되어 여야간의 갈등이 극화된 상황에서 박근혜가 복지 정책을 강조하며 나타나자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박 전 대표는 날치기로 그 많은 복지 예산이 완전히 삭감될 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유리할때만 고개를 든다"며 박근혜의 행보에 비판을 제기했다.[40] 조선일보도 사설에서 "박 전 대표는 왜 내키는 주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국민이 박 전 대표에 대해 궁금한 일을 물을 기회는 만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거북한 주제를 피하려 한다는 느낌을 준다."고 지적했다.[41] 박근혜의 이러한 미지근한 행보에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한 비판도 있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박근혜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도 지지하는 사람은 삼십몇 %나 된다"라며 "내용도 모르고 좋아하는 것은 감성의 정치일 것"이라고 비판하였다.[42] 그러나 박근혜의 지지자들은 박근혜의 말에 신뢰를 보낸다. "박근혜의 신중함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불안감에 젖어있는 국민에게 위로와 신뢰를 준다"는 평가가 있다.[43]
국가관 발언에 대한 비판[편집]
박근혜는 2012년 6월 1일 비례대표 부정 경선과 '종북' 논란에 휩싸인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해 "국가관을 의심받고 또 국민도 불안하게 느끼는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이어 제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퇴가 안되면 그렇게 가야된다고 본다"고 답했다.[44]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언론과 지식인 사회는 물론 심지어 당 내부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두 사람의 종북 여부는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이고 경선부정도 내부조사와 징계절차를 지켜보는 것이 순서이며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종북’으로 몰아 의원직 제명을 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태라고 비판했다.[45]
한겨레 신문 역시 국가관을 이유로 의원직을 박탈해야 한다는 것은 매카시즘 시대에나 나올 법한 마녀사냥식 발언이라 주장하고, 박 의원 발언은 무엇보다 그의 민주주의적 소양을 의심케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르다고 기본권을 제약할 수 없으며, 생각이 무엇인지를 따져서 국회의원 자격이 있네 없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설은 종북으로 제명을 논하면 마녀사냥이라는 같은 당 하태경의 발언을 인용하고, 박근혜의 민주주의적 소양이 당의 평균적 인식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46]
프레시안도 칼럼을 통해 박근혜가 "민주주의도 법치주의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국가관 운운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와 국민주권을 헌법전 속에 유폐시킨 박정희의 그림자를 박근혜에게서 발견하는 건 서글프고 두려운 일이라면서, 국가관을 의심하고 이를 국회의원직 제명의 근거로 삼는 것은 파시스트적 폭력이라고 비판했다.[47]
법학교수 출신인 새누리당의 이상돈 전 비상대책위원장도 박근혜의 발언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6월 6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은 국회법상의 해석에 맞지 않다며 "정확한 법적 해석을 할 것 같으면 잘못된 발언"이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해 국회법 138조에 따른 의원자격심사를 통해 제명하는 것은 법리상 적법하지 않은 절차라는 것이다.[48]
연합뉴스 사장 출신의 언론인 김종철은 미디어오늘 칼럼을 통해 박근혜의 매카시즘 성향을 비판했다. 박근혜의 국가관 발언에 대해 김종철은 칼럼에서 "그들이 어떤 ‘종북행위’를 했는지에 관한 명확한 증거도 없이 ‘주사파’라고 보면서 국회에서 제명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매카시즘"이라고 주장했다.[49]
최저 임금 논란[편집]
박근혜는 2012년 8월 7일 뉴미디어 토론회에서 최저 시급을 묻는 사회자에게 "5000원 좀 넘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4580원이라는 사회자의 정답 발표에 박근혜는 "아르바이트 시급이 5000원이 안 되느냐"고 대답했다. 참고로 박근혜는 지난 18대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이었다. 이에 야권에서는 박근혜는 "평생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 "서민과 노동자의 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 이라고 주장하며 여태까지의 서민 코스프레가 위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강력히 비난하였다.[50]
인혁당 사건에 관한 입장에 대한 논란[편집]
박근혜는 2012년 9월 10일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앞으로의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51]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언론과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로부터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 후보의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는 발언은 헌정절차가 정지된 유신 때 이뤄진 유죄 판결과 민주화 이후 사법부가 무죄로 교정한 판결의 효력을 동일시한 것이며, 이미 역사적,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사안까지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52][53][54]
경향신문과 한겨레, 한국일보 등의 언론들은 사설을 통하여 재심으로 유신 당시의 대법원 판결은 취소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 인혁당 사건이 무죄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법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55][56] 특히,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사실상의 헌법중단 상태인 유신 치하의 원판결과 민주화 이후의 재심 판결에 똑같이 '정치 상황'이란 잣대를 들이댄 결과라면 실로 심각하다"면서 그럴 경우 "대한민국의 사법절차, 나아가 헌정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라고 비판했다.[57]
광주광역시의 시민단체와 법조계는 박근혜 후보의 발언이 사법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58] 또한 전국 11개 로스쿨의 인권법학회 학생들도 성명을 통해 박근혜의 발언은 역사인식의 심각한 결여와 법체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59][60]
야당들도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일제히 비판하였다.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와 국가배상이 선고되고 사법부가 사죄까지 한 점을 지적하며,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사법부와 유족을 모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사과를 요구했으며, 같은 당의 이해찬 대표 역시, 판결은 하나라는 점을 지적하고, 박 후보의 발언이 대법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그밖에 유인태, 박지원, 박영선 의원 등도 "사법부를 무시한 황제적 발언", "일본 극우파들보다 더한 것", "헌정질서를 무시하는 초사법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했다.[61][62][63] 진보신당 역시 박근혜 후보의 태도에 대해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는 에둘러 말하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보수 정치인들의 구태라고 비판했다.[53]
이러한 비판이 제기되자, 박근혜 후보는 다음 날 대법원 판결은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당시 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증언까지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64][65]
하지만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마저 호도"한다거나 "현대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근혜 후보가 말하는 증언들이란, 박범진과 안병직 등의 증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증언은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증언들로, 손석희 교수가 방송에서 질문한 유신 시절의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65][66][67][68]
2012년 9월 12일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새누리당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이미 박 후보는 2005년에 국정원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할때도 '한 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며 "사람이 억울하게 8명이나 사형당한 사건을 가치가 없고 모함이라고 말하는 박 후보는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있는가.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고 비난했다.[69]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안병욱 교수는, 박 후보는 사실관계 가운데 법원의 재심 판결이나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처럼 공신력 있는 부분은 무시하고, 공신력이 없어 신뢰가 가지 않는 이야기에 무게를 싣는다면서, 이는 상대를 설득해서 믿도록 해주는 방식은 아니라고 말했다.[70]
당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한승헌 변호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두 개의 판결’이라는 말은 당시 사건의 날조과정이나 재판의 허구성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고 하는 말 같습니다. 재심 무죄 판결 이상의 역사적 판단이 있을 수 없다고 봐요. 막연한 도피처처럼 역사의 판단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겁니다.”[71]
한편, 보수언론인 조선일보 역시 사설을 통해,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2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어둠의 역사에 속한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공감대라면서, 반면 박 후보의 유신관은 박정희식 유신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대통령 후보의 유신에 대한 입장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개인사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72]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발언에 대해 각계 각층으로부터 비판이 잇따르자, 2012년 9월 24일, 박근혜 후보는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의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였다.[73] 이에 대하여 인혁당을 "민혁당"이라고 잘못 말한 것, 사과 후 기자들의 질문을 일절 받지 않은 것 등을 지적하며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반응들이 있었다.[74][75][76][77][78] 유족들은 진정성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79]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평가한다고 하면서도,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후속 조치를 요구하였으며, 안철수 후보 등은 필요한 일이었다고 평가하였다.[80]
비리 전력자와 '철새 정치인' 영입에 대한 논란[편집]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이른바 국민 대통합을 명분으로 다양한 인사들을 영입하였다. 하지만 이들 영입 인사들의 전력에 관해, 그들이 비리 전력자이거나 철새 정치인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박근혜 캠프의 국민대통합위원장인 김종인은 1993년 동화은행에서 2억여 원을 뇌물로 받아서 의원직을 상실하고 2년 징역을 산 일이 있다는 점이 논란이 되었다.[81] 한광옥은 나라종금으로부터 퇴출 무마 청탁과 함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2005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비리인사 영입은 당 안팎으로부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전여옥은 2011년 영입 당시 김종인의 비리 전력을 지적하며 비판했고, 안대희는 2012년 10월 8일 한광옥이 국민대통합위원장에 임명될 경우 자신이 맡고 있는 정치쇄신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기자 회견을 했다.[82][83] 중앙일보의 김진 논설위원은 칼럼을 통하여 재벌과 은행의 투명경영을 유도해야 할 청와대 경제수석의 자리에 있으면서 오히려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은 중대한 일이라면서, 그런 김종인을 공동선대위원장에 임명한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이게 박근혜의 원칙인가"라고 물었다.[84]
박근혜 후보의 벤처특보로 영입된 장흥순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적자를 감추기 위해 700억 원대의 분식회계를 했다가 구속, 기소되어 2005년 유죄 판결을 받았던 전력이 있어서 당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다.[85]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영입된 김규옥 광주시민단체총연합회 대표는 2001년 1월부터 2006년 말까지 총 149차례에 걸쳐 노인무료급식 보조금 1억 7000여만 원을 자신의 생활비 등으로 사용해 업무상 횡령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86]
한편 과거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에 속했던 일부 인사들이 2012년 10월 15일 새누리당사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자신들은 과거 유신 체제에 맞섰으나 국민대통합을 위해 박근혜 후보 지지를 결심했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과거 전력을 보면, 사실은 당적을 매우 빈번하게 옮겼던 이른바 철새 정치인이거나 과거에 이미 한나라당에서 활동하였던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87][88]
이날 회견에 참여한 안동선 전 의원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2004년 1월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지만,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다시 탈당해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였다. 이윤수 전 의원도 2002년 안동선과 함께 탈당했고,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 지지에도 동참하였다. 송천영 전 의원은 1992년 민주당을 탈당, 국민신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그해 11월에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으며, 1997년에는 이회창 후보 불가론을 주장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다. 그 뒤 2000년에는 민주당에 공천 신청을 했고, 2002년 12월엔 이인제를 따라 민주당을 다시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하였다. 송 전 의원은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는 다시 한나라당 대전시당 고문직을 맡아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송 전 의원은 또한 2007년 강창희에게 불법 정치자금 3000만 원을 건넸다가 돌려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과 추징금 3000만 원을 선고받고 구속됐던 전력도 있다. 이 밖에 이날 회견을 한 조한천, 이희규, 반형식 전 의원 등은 지난 2004년 혹은 2008년 총선에서 이미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던 인사들이었다.
이들 영입 인사들은 이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과는 각을 세워 치열하게 싸웠지만, 그 딸인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고심 어린 결단을 꼭 알아달라"며 "이번 결심을 하는데 정말 고심이 많았다."라고 하였으며, 김무성은 이를 두고 "감동의 정치"라고 말했다.[87][89]
2012년 10월 25일에 있었던 이인제의 입당도 이른바 철새 영입 논란을 일으켰다.[90] 한국일보 사설은, 국민대통합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전력을 따지지 않고 영입하는 것은 새누리당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등의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비판했다.[91]
전태일재단 방문 시도 관련 논란[편집]
2012년 8월 28일 박근혜는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유족과 노동자들의 거부와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를 두고 박근혜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비판의 목소리들이 잇따랐다.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인 전순옥은 진정으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른바 국민대통합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현안이 일어나는 현장을 먼저 찾아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며 5·16 쿠데타와 유신, 군사 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92]
전태일의 남동생 전태삼도 박근혜는 22명의 쌍용차 사망 노동자들의 분향소부터 방문하였어야 한다면서 새누리당사 앞에서 20일 넘게 대책을 요구하는 쌍용차 해고 노조원들의 요구엔 묵묵부답이면서 전태일 재단을 방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93]
진중권 교수 역시 박근혜의 방문 시도에 대하여 진정으로 소통과 화해를 하겠다면 지금 눈앞에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는 것은 쌍용차는 ‘현재’에 수행해야 할 책임을 의미하는 반면, 전태일 재단은 ‘과거’로 면피할 소재라 보기 때문이라면서, 이는 노동자의 고통까지 정치수단화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했다.[94]
민주당 쌍용자동차대책 특별위원회 역시,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 후보가 나설 것을 요구하며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해고 노동자들을 먼저 만날 것을 촉구했다. 같은 당 은수미 의원도, 최저임금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박근혜 후보의 방문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면서, 정리해고와 용역폭력 등에 고통 받는 수많은 지금의 전태일이 겪고 있는 문제에 답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말했다.[95]
한편, 새누리당의 이상일 대변인은 방문이 무산된 데 대해, "박 후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무리 방해를 하고 장막을 친다 해도 국민을 통합하겠다는 박 후보의 행보를 막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반드시 물리치고 국민대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93]
기타[편집]
- 박근혜의 재산은 2010년 4월 기준 건물 19억 7천 7백만원, 자동차 등 8천 1백 90만원, 예금 1억 2백 59만 6천원, 도합 21억 6천 1백 49만 6천원이다.[96]
- 진보 진영에서는 "독재자의 딸이며,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보수적이며, 콘텐츠가 부족한 감성형 지도자"로 평가한다. [출처 필요]
- 일부 야당 의원들은 미디어법 이후로 그를 기회주의자로 평가한다.[97]
- 미디어법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했고, 일부 수정된 미디어법을 찬성하여 다시 한번 박근혜의 영향력을 확인했다. 하지만 미디어법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로 그의 원칙주의는 깨졌고 지지자들에게도 큰 비판을 받았다.[98]
- 2007년 대선 이후로 박근혜는 차기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내준적이 한 번도 없으나 2011년 9월 이후로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열풍'에 힘입어 차기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59.0%, 박근혜 32.6%로 안철수가 압도적인 지지율을 나타내면서 '박근혜 대세론'이 끝났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99]
-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서울대생들이 대선 후보들에 대해 평가한 책을 냈다. 서울대생들은 박근혜 의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밝은 점은 이용하고 어두운 면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 같다며 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아버지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 밖에도 국가와 결혼한 애국자란 이미지가 있지만 서민의 삶은 잘 모르고 국민과 소통 및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며, 수첩공주라는 별명처럼 사전에 계획된 멘트만 하는 등 거부감을 준다고 평가했다. 또한 박근혜 의원의 자기 비전과 위기 대처 능력, 젊은 층과의 소통 능력 등에 의문이 든다는 평가도 있었다.[100]
- 2012년 7월 1일, 프레시안과 원지코리아가 정치부 기자 222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박근혜는 '차기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에서 문재인과 김두관에 이어 약 18%의 지지율로 3위를 기록하였으며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후보'를 묻는 질문에서는 약 35%의 압도적인 비율로 1위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서는, 과연 대통령이 되었을 때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101] 윤여준 전 장관은 조사 결과에 대하여 정치부 기자들은 실상을 보는 위치에 있다면서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될 후보 1위로 꼽혔다면 이는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윤 전 장관은 또한 박 전 위원장은 당 운영 방식 등을 보면 공공성에 대한 의식과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당을 사유화하고 1인 지배체제를 만든다는 경쟁자들의 비판에 대해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고 말하였다.[102]
정책적 측면[편집]
- 2005년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 법안에 반대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고무·찬양과 같은 독소 조항을 빼자고 주장했다.[103]
- 2002년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한나라당 내에서 김정일을 만났던 정치인은 박근혜가 유일하다. 이는 박근혜가 남북 관계에 대해 새누리당 주류의 인식과는 다른 '나름의 관점'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는 주장이 있다.[103]
-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정국'때에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 미디어법에 대해서는 "직권상정하면 미디어법 반대표 던질 것"이라며 "여야합의처리를 할 것을 요구한다"라며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104] 또한 미디어법 중재안을 제시하였다.[105] 하지만 이후 한나라당이 박근혜의 지적을 받아들였다며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직권상정에 찬성하였다.[106]
- 세종시 법안에 대해서는 원안대로 또는 원안 플러스 알파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107]
-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08]
-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 군사 정변은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하였다.[109]
- 박근혜는 뉴라이트 세력과 가까운 모습을 몇 차례 보여주며 역사 인식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면을 드러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길은 다르지 않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선진화를 위해 '공동체 자유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한다는 것도 같다"고 하기도 했다.[110] 또한 뉴라이트 교과서를 극찬하며, 뉴라이트의 교과서 포럼 등의 교과서 수정 움직임을 지지한 적도 있다.[111]
- "일부에서는 자신을 보수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노선은 중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112] 박근혜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가는 과장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친박계'와 달리 '친이계'는 과거 운동권 출신 인사가 포진해있고, 4대 개혁 입법 대해 비타협적 태도를 취한 사실과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이명박 후보가 실용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이라는 이유다.[103]
같이 읽기[편집]
각주[편집]
- ↑ "박근혜는 여성주류화의 현실적 대안" "박정희와 지역주의 그림자에 불과"
- ↑ <서화숙 칼럼/9월 14일> 세습을 반기는 사회 Archived 2013년 1월 27일 - 웨이백 머신한국일보, 2012년 9월 14일
- ↑ <중앙시평> 박정희의 희극, 박근혜의 비극 중앙일보, 2012년 10월 18일
- ↑ 월스트리트저널,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 미디어오늘 2012년 12월
- ↑ 외신들도 하나 같이 ‘독재자의 딸’로 표현 미디어오늘 2012년 12월
- ↑ mbn 24시 주요뉴스 MBN 2006년 6월 27일자
- ↑ 7.00 7.01 7.02 7.03 7.04 7.05 7.06 7.07 7.08 7.09 7.10 7.11 7.12 7.13 7.14 7.15 7.16 7.17 7.18 7.19 7.20 7.21 7.22 7.23 7.24 7.25 7.26 7.27 7.28 7.29 7.30 7.31 7.32 7.33 7.34 7.35 7.36 7.37 7.38 박근혜 "아이 있다는 말 천벌받을 일" Archived 2013년 9월 28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07년 7월 19일자
- ↑ 8.0 8.1 (사설) '절반의 성공 그친 '李·朴 검증청문회'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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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 10.1 10.2 박근혜, 차분하게 각종 의혹 적극 해명 Archived 2013년 9월 28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07년 7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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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비방글'은 근령씨 남편이 작성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2/17/7030554.html?cloc=olink%7Carticle%7Cdefault[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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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6 옹호 박근혜 발언 국민 절반이 “동의 못한다”《한겨레》, 2012년 7월 29일 작성
- ↑ 한 발 뺀 박근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
- ↑ 박근혜, "5·16 정상적인건 아니지않나" 해석분분 《아시아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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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박근혜의 민주주의관을 묻는다 경향신문, 2012년 6월 3일
- ↑ (사설) 민주주의 소양 의심케하는 박근혜 의원 발언 한겨레, 2012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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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 '색깔론' 공세 속 신중론 목소리도 커져 Archived 2015년 4월 23일 - 웨이백 머신 뉴시스, 2012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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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인혁당 판결이 두 개’라는 박근혜 후보의 법치 인식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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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찬 "朴 인혁당 발언, 대법원 모독" Archived 2015년 4월 23일 - 웨이백 머신 뉴시스, 2012년 9월 10일
- ↑ 민주당, 인혁당 관련 박근혜 후보 비판 잇따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KBS, 2012년 9월 11일
- ↑ 박근혜 "인혁당 평가, 최근 여러증언 감안해야"(종합) 연합뉴스, 2012년 9월 11일
- ↑ 65.0 65.1 ‘인혁당’ 사실관계마저 호도…자기신념에 갇힌 박근혜 한겨레, 2012년 9월 11일
- ↑ 박근혜가 주장하는 인혁당 ‘다른 증언’은 1차 사건과 혼동한 듯 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
- ↑ 박근혜, 인혁당 반론 펴다 현대사 무지 드러내 오마이뉴스, 2012년 9월 11일
- ↑ 박근혜, 1차 · 2차 인혁당 사건 구분 못 했나 노컷뉴스, 2012년 9월 11일
- ↑ [13] 이도형 기자, 인혁당 유족 “박근혜, 칠푼이·정신나간 여자·발달장애인” 맹비난, 이데일리, 2012.9.12.
- ↑ ‘인혁당’ 사실관계마저 호도…자기신념에 갇힌 박근혜 한겨레, 2012년 9월 11일
- ↑ “박근혜 인혁당 발언, 사건 날조·재판 허구성 모르고 하는 소리” 경향신문, 2012년 9월 14일
- ↑ <사설> '박근혜 시대' 열려면 '아버지와 딸' 個人史 넘어서야조선일보, 2012년 9월 14일
- ↑ 박근혜 "5.16·유신·인혁당 피해자 가족에 사과"(종합) 연합뉴스, 2012년 9월 24일
- ↑ 野, 박근혜 후보 사과 진정성에 의문 "질문 왜 안 받나?" 머니투데이, 2012년 9월 24일
- ↑ 민주 "박근혜 인혁당을 민혁당이라 읽어…진정성 의문" 서울방송, 2012년 9월 24일
- ↑ 박근혜, 인혁당을 민혁당으로...조국 "그에게 같은 사건일 것" 머니투데이, 2012년 9월 24일
- ↑ 박근혜 '민혁당'이라 발음한 까닭이… Archived 2012년 12월 16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12년 9월 25일
- ↑ 박근혜와 언론의 ‘역사 조롱’ <손석춘 칼럼>미디어오늘, 2012년 10월 10일
- ↑ 인혁당 유족 "박근혜, 마지못해 사과하나"(종합) 연합뉴스, 2012년 9월 24일
- ↑ 박근혜 과거사 사과에 문재인-안철수 반응 온도차 프레시안, 2012년 9월 24일
- ↑ 돌아온 전여옥의 '독설' 아시아경제, 2012년 1월 6일
- ↑ "김종인은 수뢰·철새… 이준석은 김종인 들러리" Archived 2011년 12월 30일 - 웨이백 머신 한국일보, 2011년 12월 29일
- ↑ 안대희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임명땐 사퇴"(종합) 연합뉴스, 2012년 10월 8일
- ↑ <김진의 시시각각> 뇌물 망각증[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중앙일보, 2012년 7월 9일
- ↑ ‘700억 분식회계’ 처벌 장흥순, 박 캠프 벤처특보로 임명 논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중앙일보, 2012년 10월 13일
- ↑ 박근혜, 국민대통합 때문에 정치쇄신 뒷전? 아시아투데이, 2012년 10월 14일
- ↑ 87.0 87.1 '대표 철새' 집합시켜 '동교동계도 박근혜 지지'? 오마이뉴스, 2012년 10월 15일
- ↑ 박근혜 지지 동교동-상도동계? “정치철새 인가” 미디어오늘, 2012년 10월 15일
- ↑ 김무성, "동교동계 입당, 감동의 정치" 머니투데이, 2012년 10월 16일
- ↑ 이인제 “지구 한 바퀴 돌았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중앙일보, 2012년 10월 26일
- ↑ <사설/10월 26일> 이인제와 손잡은 박근혜, 득이기만 할까 Archived 2013년 1월 27일 - 웨이백 머신한국일보, 2012년 10월 26일
- ↑ 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 연합뉴스, 2012년 8월 28일
- ↑ 93.0 93.1 '아수라장' 된 박근혜의 '국민대통합'…문제는 진정성 노컷뉴스, 2012년 8월 29일
- ↑ 진중권 "박근혜, 정치적 성추행 중단해야" 이데일리, 2012년 8월 28일
- ↑ 민주 "박근혜, 최저임금도 모르면서 전태일재단 방문?" 노컷뉴스, 2012년 8월 28일
- ↑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91621
- ↑ 말바꾼 박근혜에 박주선 "기회주의자" ..지지자 일부 "실망"
- ↑ 입증에는 성공…힘의 원천 '원칙'엔 흠집미디어법 모호처신에 박근혜 이미지 폭삭 Archived 2015년 4월 26일 - 웨이백 머신
- ↑ MBC 여론조사, 안철수 59%, 박근혜 33% 미디어오늘 2011년 9월
- ↑ 서울대 재학생들 `폭탄발언` "안철수 사실은…"안철수·박근혜·문재인 나름 평가 책으로 출간 Archived 2013년 12월 17일 - 웨이백 머신 매일경제, 2012년 6월 10일
- ↑ 정치부 기자들이 꼽은 '차기 대통령감' 1위는? 프레시안, 2012년 7월 1일
- ↑ 윤여준 "박근혜, 정치부 기자들 '불가론' 심각히 생각해야" 프레시안, 2012년 7월 3일
- ↑ 103.0 103.1 103.2 스크립트 오류: "citation/CS1" 모듈이 없습니다.
- ↑ 박근혜, "직권상정하면 미디어법 반대표 던질 것"
- ↑ 스크립트 오류: "citation/CS1" 모듈이 없습니다.
- ↑ 박근혜의 '득과 실'
- ↑ 스크립트 오류: "citation/CS1" 모듈이 없습니다.
- ↑ 스크립트 오류: "citation/CS1" 모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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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립트 오류: "citation/CS1" 모듈이 없습니다.
- ↑ 스크립트 오류: "citation/CS1" 모듈이 없습니다.
- ↑ 박근혜 "나는 중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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